혹은 김예지 작가의 『다행히도 죽지 않았습니다』 리뷰
『저 청소일 하는데요?』를 통해 꿈과 생계의 균형의 줄타기를 그린 김예지 작가는 『다행히도 죽지 않았습니다』를 통해 불안장애 극복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 속의 ‘나’는 처음으로 찾아간 정신과 의사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우울해 죽겠다고요! 불안해 죽겠어요! 사실 그 모임에 절대 안 가고 싶고 과 모임도 싫어요! 애들은 그 정도까지인 줄 몰라요! 하지만 전 집에 돌아오면 모든 힘이 빠지고 곤죽이 돼서 잠드는데, 잠도 잘 안 와요! 너무 내가 바보 같아서요!(p.47)”
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었다. 나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우울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있기 싫었다. 사람은 무섭고 귀찮고 성가셨다.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 사람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웃고 떠들기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무표정, 아니면 울상이었다. 내가 한 말을 곱씹고 나의 행동을 되짚으면서 못난 나를 꾸짖는 시간으로 밤을 보냈다. 그건 10대, 20대를 지나 30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돈을 벌고 있지 않아서’ 자존감이 낮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연히 온 기자 제안을 받았고, 안정적인 수익이 생기면 나의 정신건강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없었던 자존감과 에너지가 억지 사회생활을 한다고 생겨날 리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에너지를 올려주는 약’이라면서 ‘아빌리파이 정’ 반 알을 아침에 먹도록 처방해주셨으나 플라시보 효과도 없었다. 기사를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아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나거나, 행복하거나, 효능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기사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는 마냥 굴었다. 토요일에도 취재 거리가 있으면 먼저 가겠다고 나섰고,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없는 열정은 너무 빨리 불타버렸다. 재료 없이 달구기만 한 프라이팬처럼 까맣게 타버렸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좋은 상사와 팀원을 만났으며, 꾸준히 성장 중인 기업이었다. 직원들을 위한 복지도 좋은 편이었고, 야근이나 주말 근무도 거의 없었다. ‘6개월만 더 버텨서 퇴직금은 받아’ 라거나, ‘경력이 되려면 2년은 되어야 한다’ 같은 말들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내 몸과 마음이 사회생활을 이어나가기에는 위태로운 상태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건강이 좋지 않음을 밝히고 6월 30일 부로 기자를 그만뒀다.
출퇴근 길에는 공황장애와 맞서야 했다. 공황장애 자체도 문제지만 공황장애가 올까 봐 미리 공포를 느끼고, 그 감각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퇴근 후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다음 날 출근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긴장되는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진짜 공황이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출근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서 비실거리는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곤 했다. 물론 돌아오는 길의 공황은 덤이었다.
“무섭더라도 지하철을 타고 다녀보셔야 해요”
정신의학과 선생님의 말처럼 지옥의 9호선을 매일 타고 다니다 보니 예기불안은 조금 가라앉았다. 9호선 급행은 중간에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콩나물시루였다. 공황이 와서 죽겠다고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춤을 춰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심장이 콩콩거리고,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시야가 좁아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는 했으나 그럴 때면 ‘마보(마음보기)’앱을 켜서 마보지기 유정은님의 목소리에 집중하거나, 눈을 감고 내 숨결에 집중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했다.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안정을 찾았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어 쌍욕을 했다가 반복하는 사이 지하철은 열심히 제 갈길을 가서 나를 정류장에 토해놓았다.
공황과 함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부정적인 신념들이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채워지지 않은 욕구와 결핍으로 똘똘 뭉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취재를 위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 할 때에는 ‘내 전화를 거절하지는 않을까’, ‘내 말투가 불쾌하지는 않을까’, ‘취재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미리 걱정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아주 기본적인 일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전화 한 통을 걸어 약속을 잡는 데에도 온 힘을 다 쏟아야만 했다. 내가 전화하는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였다. 남이 보는 나를 과민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공포가 컸다.
정신의학과 선생님은 불안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약을 처방해주셨지만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건 나였다. 약을 먹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사람이 무서웠다. 밥을 먹으러 가면 누가 어디에 앉고,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테이블 앞에 서서 뚝딱거리기 일쑤였고, 덜덜 떨리는 손을 들킬까 봐 물을 따르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편을 택하곤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이런 거 하나도 못 하다니 나는 사회생활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확실해’하고 낙인찍고 자학하기를 반복했다.
사실 무섭다. 퇴사라는 결정마저도 ‘회피’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부딪혀야 하는 순간마다 회피해온 나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다행히도 죽지 않았습니다』에서도 “회피는 큰 힘이 들지 않으면서 가장 확실하게 불안을 잠재워 줬”지만 “수많은 회피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나는 무능력해졌다(p.83)”고 말한다. 이어 “가장 좋은 방법인 회피가 사실은 가장 날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p.84)”고 덧붙인다. 이렇게 점점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용도폐지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불안을 만들고 우울로 끌어당긴다.
다시 무직자가 된 나는 상담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일을 하면 다시 정신 건강이 악화되는 굴레에 빠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뫼비우스의 띠’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나을 것이다. 그러니 죽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p.229)”고 말한다.
망했다는 감정이 수시로 올라온다. 그렇다고 세상과 맞서 싸우기에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둥지 밖이 무서운 아기 새(p.79)인 셈이다. 둥지 밖을 떠나 '자립형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못나 보이기만 한다. 게다가 퇴사까지 했으니 정말 큰일이다. 내일부터는 당장 뭘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도 밥과 약을 챙겨 먹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억울하다. '언젠가는 김예지 작가와 같이 “다행이다 살아있어서(p.235)”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