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갈등에 관하여
이번 보궐선거에 핫하게 떠오른 무리가 있다. 20대 남자이다. 20대 남자들의 선거 결과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는지, 정치권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호들갑이다. 나의 딸은 이번에 선거를 처음으로 실시한 이여자. 20대 여자이다. 이들 20대, 30대의 남녀 갈등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거친 페미니즘과 그에 반대하는 소리를 첨예하게 대립해 왔었다. 이미 5-6년 전에 기업에서 코칭을 할 때, 왜 이들의 남녀 갈등이 심하냐는 질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볼 만한 주제이지 싶다. 다음은 나의 관찰 결과에 의한 가설이다.
먼저, 이여자.
지금 2-30대 여성들, 82년생 김지영에 깊이 공감하는 여성들은 어머니의 억압적인 삶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엄마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물론, 40대 후반인 우리 세대에게도 이것은 화두였다. 가족 중 가장 먼저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가족들 아침을 챙기고, 하루 종일 자식을 돌보고, 시집 식구를 모시고, 가사를 챙긴다. 지금처럼 성능 좋은 가전제품도 많지 않아서, 가사 일은 고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해도, "집에서 노는 사람"취급을 하고, 일을 해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배움이 길지 않아 단순 노동 일밖에 못하는 엄마를 "무능한"사람 취급을 했다. 물리적, 언어적 폭력도 비일비재했다. 그녀들은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대학 진학 인구가 많아지면서 가방끈이 길어진 여성들은 더 이상 참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남아 선호 사상도 옅어지고, 사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일터에 정규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차별과 억압 속에 살아온 케이스를 보아와서 그녀들의 목소리는 거칠고, 모이지 않았다. 무엇부터 바꿔달라고 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일단 드러누워 우는 어린아이 같았다. 페미니스트의 역사를 4-50년 이상 가진 미국에서 페미니즘을 접한 나는 우리나라의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함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문제든 처음에는 과격하게 시작한다. 점잖게 이야기해서 되지를 않는다. 서구의 여성 해방 역사, 미국의 흑인들의 참정권의 역사 등을 보면 피로 핀 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독립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위정자에게 도시락 폭탄 정도는 던져 줘야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성폭력은 기폭제가 된다.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들이 강남역 화장실 살해사건에 왜 여자들이 그렇게 뛰쳐나가 광분을 했는지. 여성들은 평생, 그것을 두려워했다. 더러운 기분이 드는 수준부터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희롱과, 성폭력,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폭력에 조금씩은 노출이 되었거나,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자 그 공포는 폭발을 한 것이다. 더러운 공간에 쥐가 우글거리는 거 같은 기분만 들어 찜찜하고 두려웠는데, 진짜 쥐가 튀어나와 옆 사람을 문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광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성에 대한 일자리에 대한 차별은 90년대에 많이 완화되는 것 같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더욱 강화가 되었다. 일자리의 수는 줄고, 대졸자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자, 채용에서 남녀 차별이 다시 심각해졌다. 대학에서 보면, 같은 학과 졸업생을 봐도 남학생들은 대기업 입사자가 제법 많은데, 여학생들은 중소기업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이것은 현실이다. 남학생들은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좋지 않은 일자리를 갖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다. 전체적인 파이가 작아졌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양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앞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길러진 여성들은 문제의식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계속되는 경제의 어려움은 경력단절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아이를 키우고 돌아갈 자리가 없다. 경제가 잘 돌아가서 일손이 부족하다면, 경력이 단절이 되었더라도 데려다가 쓸 것이다. 게다가 강화되는 근로자 복지, 여성복지는 아이러니하게 여성들을 기피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참 일을 해야 하는 젊은 여성에게 출산, 육아 휴가를 보장해주게 되면, 전력이 딸릴 수밖에 없다. 나도 여성이지만, 나라도 여성을 뽑지 않겠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전 수준의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매우 힘들다. 버텨야 하는데, 가부장적인 가족 내의 문화와 분위기는 여성에게 모든 짐을 지운다. 슈퍼우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적 노동의 극한을 견디지만, 여성들 커뮤니티 내부에서 오는 일을 이기적인 사치로 취급하는 질투 어린 시선도 견뎌야 한다. 경력단절로 비자발적으로 일터로 재진입하지 못한 여성들은 이런 슈퍼우먼과 비교하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에 상처를 받는다. "집에서 노는 사람"취급을 받는 것이 억울하다. 인류는 늘 아이들을 커뮤니티가 대가족이 함께 키워왔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아이는 동네가 같이 키웠다. 옆집에 애 맡겨 놓고 일도 다녔다. 그러나,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커뮤니티가 무너지면서, 홀로 육아를 떠맡는 첫 번째 인류가 되었다. 아이는 성인 여성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남자.
이남자도 할 말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군대를 가는 것과 결혼을 하려면 남자가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문화이다.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2-30년 전만 해도 남자들이 군대를 가는 것은 어쩌면 사회적 강자로서의 의무였다. 남성들이 군대를 가있는 동안, 여성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거나, 결혼하여 아이를 업고 생업에 종사하거나, 층층시하에서 사림을 떠안고 갖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었다. 한겨울에 천기저귀를 찬물로 빨던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시린다. 카카오 김범수 의장처럼 집이 가난하면 남자들, 특히 장남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주었기에, 여성들은 보통 배움도 짧고 가사와 단순 노동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압축성장을 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삶이 매우 개선이 되었다.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들의 대학 진학률을 앞섰다. 남자들이 군대 간 동안, 동기 여성들은 스펙을 쌓고 해외 연수를 다녀온다. 군 가산점도 호봉도 다 사라졌다. 내가 왜 군대를 가야 했나 억울하기만 하다.
그리고 결혼을 하려면 남성이 집을 장만해야 한다고 하는데, 취업과 급여에서 차별을 받는 여성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요구할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고소득 직업 진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리고 사회가 후진적일수록 지참금 등, 여성을 돈으로 거래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집 값이 너무나 많이 올랐다. 30년 전에 아파트 없어서 결혼 못한다 소리가 어디 있었나. 요즘은 그렇다. 지난 정권에도 아무리 벌어도 살 수 없는 집값이라 했는데, 그에 2배가 되었고, 대출 규제로 실질적으로는 5배 정도 올랐다. 이것은 단순히 집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생물의 기본 존재 이유인 종족번식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자연에 의해 적자로 생존하느냐, 도태되느냐의 심각한 문제이다. 당연히 분노한다.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정부가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차별적 요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라는 동안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반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머니 세대를 통해 대리 경험하고, 스스로 겪었던 남녀 차별과 여성에 대한 비인격적인 대우에 날이 서있는 여성 교사나 어머니로부터 남성적인 특성들은 계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남아들이 가진 신체적인, 정서적 특성은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더 활발한 육체활동을 해야 하는 남아들을 의자에 묶어 놓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문제아 취급을 하고, 진학에 각종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했다. 집에도 아버지들은 없었다. 경제성장기에 집에 오면 지쳐있거나, 가부장적인 모습을 학습하여 답습하는 아버지는 아들들을 품어주지 못했다. 남아들은 본성을 억누르고 말 잘 듣고, 얌전한 아이가 될 것을 강요받았다. 사춘기 이전에는 신체적 발달이 우월한 여학생들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것도 문제로 느껴진다. 선생님과 학교에 순응하고 인정받는 여학생들에 비해 열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도 여성들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어릴 때는 힘도 더 세고, 공부도 더 잘하고, 학교에서도 더 칭찬을 받던 여학생은 군대는 가지 않는다. 어떻게 억울하지 않을까?
가사노동의 가치가 떨어진 것도 남성들이 보는 억울함의 한 면이다. 일터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요구하는 것들이 더욱 많아진다. 경제 성장기처럼 그저 성실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뒤쳐지면 끝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일자리의 수도 계속 줄어간다. 그러나 가사 노동은 예전에 비해서 매우 쉬워졌다. 최첨단 가전제품들은 가사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급식이 보편화되고, 외식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여성들의 가사 노동은 양적, 질적으로 쉬워졌다. 즉, 가치가 떨어졌다. 육아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에 비하면 많이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일터에 있는 남성과,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의 노동의 수준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물론 워킹맘은 예외로 다룰 필요가 있다.) 남아들은 가족 내에서 이것을 목격한다. 그런데도 군대까지 가고, 그 어떤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고,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까지 떠안아야 한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할까?
남녀 갈등은 사회적 배경에 따라 제도와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오는 현상으로 본다. 우선 페미니즘 자체가 남녀 성대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배운 지금 시대의 페미니즘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들의 소리를 귀 기울 이는 것이다. 즉,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시선과, 생각과 활동이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어 보는 철학적 시각도 있지만, 나는 강자와 약자는 유동적이라는 믿음의 철학 사조에 동의한다. 성폭행, 성추행에서는 여성들이 보통은 약자이지만, 남성도 성희롱의 대상이 된다. 성추행, 성희롱 피해자, 피해에 더 노출된 자를 위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지,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의 시선은 위험하다. 반면, 남자가 결혼할 때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결코 맞지 않는 폭력이다. 집을 장만하라는 여성 측의 요구는 후진적 매매혼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가정 내 폭력과 차별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지참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에 대한 폭압은 정당화되기 마련이다. 남성, 여성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군대도 모병제를 하던지, 여성이 군대나 사회봉사를 해야 해결이 된다고 본다. 이제 여성이 국방의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어느 나라나 피 흘리지 않은 이들이 주인이 되는 일은 없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그들은 각종 국지전에 자신들의 생때같은 목숨을 보낸다. 여성들이 이 혈맹에 참여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래야, 취업에서 차별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가 있으며, 육아에 대한 사회 참여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칠 수가 있고, 생리대 무상 공급도 요구할 수 있다. 지금은 무슨 얘기를 해도 "너희는 군대 안 가지 않느냐" 소리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는 아이를 낳는다"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 것은 여성들에게 반드시 출산을 할 것을 강요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그로 인한 어려움은 외면해도 된다는 뜻인가? 또한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정당화가 된다. 남녀의 역할이 양분화되지 않는 시대가 된 지금은 딸을 키우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국방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 것은 여성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2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국방에 참여를 통해서 국가에 주인의식을 가지게 되면, 여성 스스로도 많은 힘을 가질 수 있으리라 본다. 젊은 시절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 성장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남녀 모두 젊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할 것이라고 본다. 아니면 차라리 선진국들처럼 모병제로 가는 것도 하나의 해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는 여성 참정권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많은 선진국이 여성들의 끊임없는 피 흘리는 투쟁의 결과로 가지고 간 것과는 다르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발전시킨 단단한 논리, 강약이 있는 설득 과정 그리고 자정 노력 등이 다른 근대화를 먼저 이룬 나라들에 비해 부족했다. 그래서 떼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 내가 20대이던 90년대보다 지금이 더 심하다. 그때 여성이 가정과 일터에서 노동자처럼 대우받았다면, 지금은 꽃이 되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더욱 모욕적이다. 세상은 여성들에게 아직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성들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 참여를 늘이고, 약자들과 연대하고, 남녀차별뿐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차별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공감대를 넓히고 사회적 담론에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푯수로 밀어붙여서 급조된 여성 정책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 무엇이 가장 절실한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하고, 그것을 정당하게 만들어 갈 만큼의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되지는 않을 것이고, 몇백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 딸은 나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면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으리라 믿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