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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Feb 08. 2022

인간은. 모두. 다. 두렵다

다 무서워서 그런 거야. 


10여 년 전 감성지능과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그렇구나”하면서 넘어갔지, 그것에 깊은 공감을 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 사실은 많다. 대가들이 쓴 책은 참 가볍게도 썼는데, 묵직한 말들, 그리고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내가 좀 더 산 후에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중 가장 기본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세계적 학자들이 공저를 한 이 책의 당연한 전제였다.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좋은 내용이다. 내가 강력히 추천하는 도서 중 하나이다. 상담과 코칭을 20년 넘게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공부하고, 대가들에게 물어봐 가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사람을 더 잘 이해시키고,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공식 같은 것을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러고 돌아와 보니, 마치 파랑새를 찾아 돌아다닌 남매처럼 답은 이미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워한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다 두렵다. 아무리 확신에 찬 사람도 다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도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다.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개만 크게 짖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클수록 더 강해지기 위해서 사력을 다한다. 더 강하게 보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두려워서 그러는 건데, 사람들은 그것이 강함이라고 착각하고 달래는 대신 공격한다. 그러면 그 두려움은 확신이 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하게 나가고, 공격을 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온몸에 문신을 한 조직 폭력배들은 세상 어디에 마음 기댈 데 없는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강해 보이기 위해 별 짓을 다 한다. 


범죄와 관련된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관련 전문가들이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등장을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가진 두려움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범죄자들의 극악무도함을 지적하고,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뇌의 생물학적 이유로 극악무도함이 생기는 일도 제법 있다. 하지만, 이 뇌의 생물학적 이유에 성장기에 부모에게 당한 학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크다. 이러한 소위 극악무도한 사람들 중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는 없다. 유복하더라도 각종 폭력과 냉대 등 학대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결국 죽음이다. 이 두려움을 가장 자극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맹수의 공격, 자연재해 등이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하지 않다. 다른 맹수들에 비해서 신체가 열악하고 2-3년 간의 돌봄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에게 사람들에게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함은 죽음이다. 즉,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 가장 강력한 두려움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비난”이다. 이 비난은 사랑을 받지 못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목숨을 위협한다. 그러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물리적 폭력이 없어도 악성 댓글에 목숨을 끊는 유명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 비난은 삶 자체를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게 할 만큼 폭력적이다.  


우리나라는 비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blame culture라고 한다. 탓을 하고, 비난을 하는 문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린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졸업생이 학교를 방문했다. 졸업생을 반갑게 맞아주신 교수님은 비행 일정이 있으셨는데, 졸업생과 더 대화를 하시려고 대중교통 대신 택시를 선택하셨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가 사고가 나서 교수님이 크게 다치셨다. 여기서 잘못은 택시 사고이다. 하지만, 이 졸업생은 자신 때문에 버스를 타실 분이 택시를 타셔서 사고가 났다고 죄책감에 휘말리고 교수님께 석고대죄를 했다. 미국인 교수님은 너무나 의아해하셨다. 어떻게 그 사고가 그 졸업생 탓이냐고 말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그 원인을 끊임없이 따진다. 사고는 사고를 낸 자의 잘못이고, 교수님이 운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쩔 때는 그 누구의 탓을 따질 수 없는 “그냥 그런 것이다”라고 넘어갈 일도, 누군가 비난의 대상, 즉 희생양을 찾는다. 노후된 선박에 무책임한 선장 때문에 아이들이 죽으니 대통령이 그 책임을 지라는 나라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그 “탓”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책임자를 벌을 주는 것이 문제의 종착점이 된다. 정작 우리는 책임자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는다. “어떻게 재발을 방지할 것인가?”이다. 해경 잘못으로 해경을 해체했다고, 바다에서 이제 해경이 해결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비난 문화는 문제 해결에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에 가장 큰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제의 책임 소지가 있는 사람은 비난이 두려워 빠른 대처나 사과 재발방지 대신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을 대비하여 기록을 아예 남기지 않는다거나, 희생양을 두는 식의 해결책을 찾게 된다. Shame and blame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부끄럽게 하는 방식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 그들의 인간 됨됨이를 탓함으로써, 그들에게 무서운 벌을 내림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잠시 땅에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움으로 해서,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느낌, 정의롭다는 느낌으로 두려움을 외면하고 덮어버린다. 다음에 그런 일은 또 일어난다. 사회적 반성이 없다.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노력이 없으면 이런 일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범죄자도 두렵고, 사회도 두렵다. 범죄자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정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충분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양육의 문제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잘못된 양육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 그 원인을 본인의 부적절함이라고 끊임없이 비난받아왔다. 세뇌되었다. 그래서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본인이라고 그 비난을 내재화한다. 그런 사람은 희망을 잃는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과 돌봄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모른다. 내면의 공허함과 허기짐을 우연히 다른 것으로 잠깐 잊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범죄자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주는 순간적인 쾌락에 도취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의 폭력 앞에서 무력했던 그 상처를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 그것이 학습이 되어, 그것이 진짜 자신의 결핍의 원인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핍을 해소해주지 않는 가짜 먹이이다. 그러니 점점 더 많이, 더 잔인하게, 더 폭력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사랑과 돌봄을 갈구하던 그 딱한 아이 시절의 외로움, 서러움, 자기 연민 등은 잊게 된다. 두려움에 덜덜 떨던 아이는 이제 누군가를 두렵게 한다. 내면의 두려움을 덮어둘 수가 있다. 그리고 한번 그런 방식으로 큰 쾌락을 맛본 범죄자는 죄 없던 시절부터 떨어지던 비난을 드디어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라고 항변할 힘이 없는 그들은 그냥 나쁜 아이가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한다. 이제 맞서 싸우거나, 자신은 비난하던 이들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진다. 상황이 평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경찰에 잡혀도 편안해 보인다. 


사회도 두렵다. 자꾸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니 그것이 내 탓인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비난의 화살을 이 범죄자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책임을 면하고,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광장에서 창녀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죄 없는 자들만 돌을 던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부터 돌을 던지라 하였다.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돌을 던진다.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지 못한 권력자들, 사회적 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힘 있는 어른들. 그들이 가장 큰 돌을 던진다. 처벌을 강화하고, 그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그들을 죽이기도 한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들, 가르침이라는 핑계로 학생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선생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 모두 돌을 들고 가서 범죄자에게 던진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저 정도로 나쁘지는 않아”라고 안도한다. 사실은 때리지 않아도 되는데 때리고, 내가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되는 것을 상대를 게으르다고 탓하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이루라며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부모들. 그들은 다 자신의 부적절함을 알고 있다. 그런데 두려워서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명작으로 평가받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망한 영화감독은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몰아세워 주연 배우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고 자신 역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한 채 백수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자신은 천재 감독이고 싶다. 그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주연 배우가 보인다. 그녀의 연기 지적을 하면 그녀가 점점 위축되고, 점점 연기가 엉망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후진 것을 가리기 위해 그녀에게 점점 더 많은 비난을 퍼붓고, 그녀는 점점 망가지고, 결국 그는 주연 배우의 연기 문제로 망한 비운의 천재 감독이기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한 명의 배우의 인생과 커리어를 무너뜨린다. 물론 자기도 함께 몰락한다. 그래도 이 감독은 훌륭하다. 이러한 성찰이 되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찰을 할 지적인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리고 내가 내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들도 하도 비난을 받아서 그렇다. 비난을 많이 받던 사람은 두려움이 많고, 그렇게 되면 아주 사소한 잘못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난이 적은 혹은 사랑과 돌봄이 넘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 문제를 직면하고, 자신이 부끄럽고 아프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부적절함. 사실은 그중 대부분은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인 스탠퍼드 의대 얄롬 교수는 본인의 저서에서 수련 시절 본인의 지도 교수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저는 어머니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유산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도 교수는 “인간이 다 그렇지,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였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정도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입력이 되었다. 죄책감을 많이 가질수록 지배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의 계략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인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부적절함은 두렵다. 그것은 내 본심을 들켜서, 내가 부적절한 인간인 것이 드러나서 더 이상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부적절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사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더 적절하게 문제를 해결해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군사들의 두려움을 용기를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비난을 멈추고, 인간의 수많은 다양성에 관대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범죄자들을 딱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좋은 사람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범죄자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못하는 데도 자기가 잘한다고 우겨요.” “쟤는 관종이에요.” “저 사람은 우리를 너무 괴롭힙니다.” “리더가 맨날 화내고, 다 우리가 못난 탓이라고 야단만 칩니다.” “아이가 자꾸 거짓말을 합니다.” “그가 늘 저를 협박하고 때립니다.” 그 모든 사람들. 사실은 비난받을까 봐, 용서받지 못할까 봐, 결국 사랑받지 못할 존재일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용서하고 사랑해 주면 된다. 물론, 너무 미워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럴 때는 그냥 두면 된다. 우선 나 스스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내가 여기서 몸부림치고 부르짖는 것처럼.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잘 안 되는 것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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