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정 May 04. 2020

5월은 폭력적이다.

“그냥 좀 남들처럼 보통스럽게 살면 안 돼?” 

내가 나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다. 상담을 받으며 보통으로 살고 싶다고 펑펑 울기도 했다. 나의 별남이 나의 인생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나는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나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내 팔과 다리를 깎아내는 상상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 2년 당했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 한순간 순간의 아픔은 아직도 나를 관통한다. 학교 행사가 많은, 특히 스승의 날이 있는 고3 때 5월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얇은 침처럼 느껴졌고, 수만 개의 침이 나의 살을 파고드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내가 잘 산다고 선생님이 나를 이뻐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낸 아이들의 폭력을 집중적으로 견뎌야 했다. 내가 어떤 선생님에게 어떤 선물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모두 째려보고 있었고, 나를 예뻐한다고 선생님들조차 따돌리던 아이들은 스승의 날을 선생님들을 향한 공격의 날로 삼았다. 감사의 표시를 안 하는 것으로 말이다. 한 반에 서울에 있는 대학 한 두 명 가는 강북에 있는 여고에서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권에 있는 나를 선생님들이 챙기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당한 편애로 비쳤고, 나와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적이 되어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나 이외의 몇 명의 타깃을 정해서 선생님들과 엮어 루머를 퍼뜨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사귄다는 루머까지 만들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 참담함을 아이들 앞에서 고백하시기도 했다. 남자 담임 선생님까지 무너뜨리는 그 폭력을 견디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학 원서를 썼을 때, 합격한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좋은 학교를 써주었냐고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던 아이들이었다. 2년 동안 수업시간에 나를 째려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아이도 있었고, 등교를 하면 갖은 상욕이 화이트로 적혀 있는 책상에 책과 공책을 올려놓는 심경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힘들어하면 사람들은 “그래도 너는 대학에 갈 거잖아”라고 했다. 그렇게 2년을 버텼다. 나는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나는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이 그래서 싫어지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5월은 그 이외에 수많은 의무로 지뢰밭과 같은 시간이었다. 어버이 날, 어린이 날 등의 가족 행사는 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빼앗아갔다. 그 누구도 나에게는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왜 누구에게 왜 이렇게 고마워해야 하나. 어린이 집에서는 왜 그렇게 부모를 불러 대며, 가정 내에서 해야 하는 효도 숙제를 내는가? 5월 말을 시작으로 6월은 양 쪽 집안의 생일이 대거 몰려 있는 달이다. 내 생일 포함해서 말이다. 대학 다닐 때는 8월까지 생일잔치를 하던 나였지만, 나는 그 이후로 내 생일을 싫어한다. 그냥 생일 같은 거 축하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되나? 


이혼을 하고 나서는 가정의 달은 나에게 지옥과 같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엄마-아빠-자식을 기본으로 하는 가족의 담론은 나를 소외시키고, 어린 딸아이가 “비정상”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계속 TV에 나온다. 그게 뭐라고… “소외감, 박탈감. 이런 건 이미 각오했어”라고 생각을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을 것 같으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은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되는 것을 짐작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5월은 파쇼적이다. 이 집단주의가 누군가에게는 감당 못 할 의무나 “루저”에 대한 공격으로 다가온다. “평범하지 못한 자들”, 가족 내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남들의 잔칫상 옆에 서있는 것만으로 우울하다. 


나는 행복한데, 내가 그런 사람들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고 할 것이다. 내가 마흔 넘어 깨달은 것이, 나의 행복이나 성취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이만큼 성취했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늘 억울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한 땀 한 땀, 피땀으로 이룬 것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운이 좋아서, 열심히 살 수 있는 재능과 성격, 그리고 나쁘지 않은 환경에 태어난 것을 당연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성취는 성취를 하지 못한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들고, 나의 행복은 누군가를 질투 나게 만들고, 나의 성장은 누군가를 초조하게 만든다는 것을. 가만히 있어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다 알게 될 것을 큰 소리로 자랑하거나, 과장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나에게 박수를 보내라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저 감사할 일뿐이다. 


나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한 전 남편이 법정에서 본인은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 행복이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한 직/간접적 업압과, 착취, 강요된 희생, 폭력 위에 가능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지가 폭력이 된다. 힘들다고 악소리를 내니 소송을 제기했다. 그래 놓고,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한다. 보이는 완벽함과 현실 부정으로 유지되는 평화를 깨는 행위를 폭력으로 제압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냥 다른 여성들처럼 평범하게 참고 살면 안 돼? 고진감래 몰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그러나, 지식인으로 혹은 혜택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평범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의무는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치이기도 하고, 나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고, 세상이 나에게 준 혜택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소외받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득권을 갖게 되면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한 시각을 가진다. 전쟁의 끔찍함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전쟁을 하나의 해법으로 더 쉽게 상정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평범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불만하지 않는다. 명이 있으면 암이 있듯이, 명처럼 보이는 것이 있으면 암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이 명인지, 암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무언가 대칭이 되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시대에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것, 중산층에서 사랑받고 자란 것, 성장기의 나라에서 태어난 것, 열심히 공부한 것, 전략적이었던 것 인정하고, 선천성 심장병 등 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것, 학교에서 미움을 받았던 것, 진학을 한 번에 한 적 없었던 것, 이혼한 것, 박사는 있는데 대학교수가 아닌 것 등을 받아들인다. 좋아 보이는 것도,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나를 괴롭히는 것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적인 갈등을 다스리며 세상과 조화하며, 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다양한 삶의 형태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부작사부작 알리면서 살겠다. 


결혼 생활도 불행한 결혼생활과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듯, 이혼도 마찬가지이다. 이혼해서 더 좋은 점도 있고, 더 안 좋은 점도 있다.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함이 더 크다. 그러니 걱정들 마시라.

작가의 이전글 진심의 함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