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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19. 2020

사람처럼 고양이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태리야 제발 놀아줘

마리를 입양했다


태리의 행복한 묘생을 위해 열공하던 중 어떤 문장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책에서 나온 여러 가지 개선방법을 모두 시도했음에도 고양이가 너무 무료해할 경우에는 둘째 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팸 존슨 베넷, 『내가 못된 고양이라고? 천만에! 』, 씨밀레북스, 2017, 146.)


이거다. 전문가가 고양이를 더 들이라고 했다! 둘이 잘 놀고 의지하면 베리 해피한 묘생과 인생! 게다가 집 안 귀여움도 두 배! 다묘익선!*

* 클리커 훈련, 환경 풍부화 등 책에서 제시한 개선법을 모두 시도한 후 결정했다. 돌이켜 보면 첫째를 보내고 남은 후회와 죄책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마리는 첫째를 많이 닮았다.

마리는 태리와 같은 인터넷 카페에서 입양했다. 어느 천사 같은 분이 쓰레기통에 유기된 갓난 고양이를 구조했는데 집에 노견이 있어 입양길에 오른 아이, 솜뭉치 같던 6주령 고등어 마리. 첫째와 태리 둘 다 8개월일 때 데려왔기 때문에 나는 아기 고양이를 본 적도, 케어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마리를 입양하기까지 공부하고 물품도 구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인생과 묘생은 실전. 지옥문이 열렸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던데, 아기 고양이도 그랬다. 똑같이 마을 하나가 있거나 집사가 최소 헐크여야 할 듯. 밥이랑 놀이 챙겨주고 합사 훈련 정도의 기본적인 케어밖에 안 했는데도 체력이 헐크 새끼손가락 손톱 거스러미만큼도 없어서인지 말라죽을 것 같았다. 전염병 잠복기인 2주간 마리를 남편 방에 격리했는데, 마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불안하면서도 궁금한 태리와 돌봄이 시급한 마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몸도 마음도 축났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아침형 고양이 태리


사실 나는 퇴사하기 전부터 여가 시간에는 락 스피릿이 충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일 때와는 사뭇 다른 락 스피릿이었다. 충동적으로 쇼핑을 하고 남는 시간은 넷플릭스와 왓챠로 채우는, 어렸을 때 담배랑 체력을 너무 태운 결과로 재활센터에 입원한 락커 같은 생활을 했다.


특히 스트리밍 서비스 때문에 퇴원이 무한 연기된 환자였다. 나는 필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카우치 포테이토가 아니라 카우치가 될 기세로 영화랑 드라마를 연달아 봤다. 그렇게 넷플릭스와 왓챠의 노예로 사는 동안 태리 놀이시간도 뒤죽박죽이었던 게 문제였다.


마리를 입양하고 락 스피릿은 죽었다. 락커처럼 계속 살다가는 마리가 죽을 것 같아서. 격리된 마리가 밥때만 되면 ‘아이고 나 죽네’ 통곡하듯 삐약삐약 울었다. 한 끼라도 안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작은 아이의 생존이 달렸다고 생각하니 아침 다섯 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매일 다섯 시부터 열 시까지 다섯 번 밥을 줬다. 밥시간이 정해지니 자동으로 식전 놀이 시간이 배정됐다. 태리가 우리 집에 온 지 반년만에 처음으로 아침에 놀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마다 엄청난 반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곱으로 풀칠된 눈이 딱! 떠질 정도로 태리가 번개처럼 날아다녔다. #THUNDERCAT. 집중력도 최고, 반응도 최고! 이른 아침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물론 원래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서 일찍 일어난 만큼 하루 종일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지만, 태리가 신난 모습을 보면 구름이 되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구름은 구름인데 지구를 매단 것 같은 구름.... 살면서 몸과 마음의 양극화가 이렇게 심했던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고양이가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기 때문에 밥, 놀이시간 등 일과표를 정해서 지킬 것을 권장한다. 이 말을 여태껏 무시한 나를 깊이 반성했다.


요즘은 밥시간 두세 시간 전에 놀아준다. 가끔 태리가 심심하다는 듯 울면 일과표를 무시하고 더 놀아준다. 놀고 싶을 때 노는 게 최고니까.


고마워 털북숭이 가족


나는 어릴 적부터 아침에 움직이는 게 대단히 고단했다. 9시 등교가 힘들고, 특히 엄마의 강요로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 가는 게 힘에 부쳐서 없던 멀미도 생길 지경이었다. 아침도 아침이지만 반복되는 루틴에 염증을 느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게, 그 반복이 주는 나른함과 익숙함이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갈망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고양이 밥을 주고 놀아주고 일찍 자는 일상. 일과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성취감도 느낀다. 30여 년 동안 하지 못한 걸 오늘도 해냈구나, 아가들과 평화로운 날을 보냈구나, 하고. 하루살이처럼 살며 방황하고 표류했던 20대의 불안은 30대에 고양이를 만나 드디어 진정됐다.


우연찮은 계기로 태리의 사냥 본능이 깨어나는 시간대를 알고 나서 태리가 더 궁금해졌다. 태리가 잘 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 게이지가 차오른다. 태리는 뛸 때마다 행복의 냄새를 칙- 칙- 뿌린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털북숭이 가족과 사는 게 이렇게 즐겁다니.


태리야 이런 행복을 알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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