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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24. 2021

RIP Mr. H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아홉 살, 중국에서의 첫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산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었던 나는 그날 밤, 1년 만에 가족과 재회해 기분이 좋아 잔뜩 취해 귀가한 아빠가 산타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악몽을 꿨던 것 같다. 그리고 국제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쯤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합창단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몇 년 후에는 뮤지컬 클럽에 가입해서 독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공부 안 하고 노래만 부르는 애. 평소에 조용하다가 노래 부르는 시간만 되면 세상 시끄러운 애. 그런 내가 어느 날 역사 시험을 보는데 백지를 내자 처음으로 나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열심히 힌트를 주던 선생님이 있다. 미스터 에이치. 선생님을 떠올리면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산타클로스를 너무 닮아서. 배가 테디베어처럼 불뚝 나오고 흰 수염이 넥타이 윗부분을 덮었다. 나는 역사 시험 범위를 공부한 게 없어서 시험은 포기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몇 년이 지나고 선생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비보였다.


오랜만에 동창과 만났는데 선생님과 부인분께서는 2004년 결혼기념 여행을 태국으로 떠나셨고, 사상 최대 규모의 쓰나미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알려줬다. 너무 늦게 알아서 장례식에도 가지 못한 못난 제자는 아직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그게 지구온난화의, 기후위기의 실체를 본 첫 사건이었다.


이후 그런 사건은 계속됐다. 더 거세지고 빈번히 일어나는 산불, 쓰나미, 벌의 떼죽음, 빙하가 녹아 삶의 터전을 잃은 북극곰들이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온 사건 등, 뉴스는 매일같이 기후위기라는 걸 알려줬지만 나는 미세먼지라는, 내 몸을 직격으로 강타한 환경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문제를 바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늦었지만 반성하며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제로웨이스트, 비건을 지향하면서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에 하나는 집 꾸미기다. 나는 예쁜 신혼집에 살고 싶었-아니, 여전히 살고 싶다. 특히 특별한 날에는 집을 꾸며서 한껏 기분을 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물건이 필요한데 그 짧은 기간이 지나면 쓸모가 없어질 테고, 버려지면 쓰인 기간보다 훨-씬 오래 걸려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는 알맹상점에서 사 온 천연 밀랍 트리 캔들(물론 밀랍이니 비건은 아니다. 아쉽), 직접 그린 고양이 트리 그림으로 완성했다. 이 정도면 작은 집에서는 어디서든 보이니까 충분히 기분이 나고도 남는다. 꾸미는 건 이쯤 해야 하니 아쉬운 마음은 뱅쇼를 끓이고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달래 볼까 싶다. 그리고 미스터 에이치의 명복을 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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