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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혁 Jun 06. 2023

발길 따라 제주 넘은 이야기 ③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 아니다

2023년 6월 6일 제주 여행 1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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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길 따라 제주 넘은 이야기 ② (brunch.co.kr)



“저기 죄송한데, 이거 한 번 봐주실 수 있으세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다소 시니컬한 서점 주인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보니 수줍음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내게 A4 용지 두 장을 내밀었다. 종이 가장 맨 위엔 <연(䜌)서재 프로젝트>라고 쓰여 있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워 보내자, 그가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길 들어보니, 이곳 ‘주제넘은 서점’은 주인의 실제 거주지에 일부 공간을 터 서재와 서점을 들인 공간이라고 한다. 그는 본업이 따로 있지만, 책과 글을 너무 좋아해 오전 시간 정도만 서점 겸 개인 서재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엔 본업을 이어가느라 문을 닫는다고 한다.


즉, 내가 서있던 2평 남짓한 공간이 서점이고, 안쪽에 숨어있는 공간이 바로 그의 개인 서재라는 것이다. 그제야 ‘연(䜌)서재’의 의미가 자연스레 이해됐다. 내부의 개인 서재에서부터 바깥의 서점으로까지 이어져오는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는 수줍어하며, 조만간 외부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 <연서재 프로젝트>를 론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오픈하기 전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브리프(brief)를 작성해 봤는데 한 번 읽어봐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 부탁의 첫 대상이었다.



다시 정리해 보면, 글쓰기 공간인 개인 서재(내부)에서 다양한 주제와 질문을 기반으로 한 글을 쓴 다음, 참여자들의 글을 편집해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서점(외부)에 진열하는 과정이었다. 더 나아가, 만들어진 결과물을 하나의 콘텐츠로써 SNS에 재생산하는 방법까지 담을 예정이라고 한다. 속으로 꽤나 감탄했다. 나만의 공간인 서재에서 꿈꾸고 나눈 이야기들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그려져 외부로 깨어 나오는 과정이라니. 스토리텔링이 실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너무 좋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서점 주인의 눈빛이 무엇이든 좋으니 고칠 것 하나만 말해 달라는 열정 가득한 눈빛이었는지라,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게 고쳤으면 하는 몇 가지 문장에 대해 ‘주제넘은’ 의견을 전했다. 그렇게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비롯해 어떤 장르의 책을 주로 읽는지, 글 쓸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임하는 지 등 좁은 공간 안에서 사내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그는 ‘아, 맞다!’ 하면서 뜬금없이 내게 하나의 그림책을 전했다. <나는 기다립니다>라는 책이었는데, 언어유희를 노리고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아주 기다란 책이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그림책은 사실 아이들이 보는 책이 아니에요. 어른들을 위한 책이랍니다. 한 번 천천히 읽어보세요”


그림책답게 <나는 기다립니다>의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모든 문장 끝에 ‘기다립니다’를 붙이면 비로소 문장이 완성되는 형태로 기술돼 있다. 몇 가지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 좋아요’라는 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나의 새로운 의미를 (기다립니다)”. 즉, 우리네 인생을 ‘기다립니다’로 쭉 이어 표현한 책이었다. 책을 다 읽자,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이들이 이 책을 보고 이런 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한 뒤 ‘좋아요’라는 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거나, 머지않아 태어날 내 자식(새로운 의미)을 향한 행복을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신이 난 듯 ‘혹시 직장인이실까요?’ 하며 또 다른 책을 건넸다. 이 역시 <매미>라는 그림책이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인간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매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동일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매미에게 17년째 쉬지 않고 일만 시키며, 인간이 쓰는 화장실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매미는 신호등을 열두 번 건너야 갈 수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잘 곳도 없어 회사 캐비닛에서 매일밤을 잠든다. 매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매미는 참다못해 옥상에 올랐고, 등껍질 속에 감춰뒀던 날개를 활짝 폈다. 그렇게 매미는 하늘을 날며 비웃듯 말한다. “매미들은 모두 날아서 숲으로 돌아간다. 가끔 인간들을 생각한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매번 똑같은 일상과 틀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지만, 결국 벗어나진 못하는’ 인간 세태를 풍자한 그림책이었다. 반면 매미는 이곳을 자유로이 떠날 수 있다.


그렇게 그가 추천해 준 두 권의 책을 읽고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서점을 나섰다. 언젠가 충분히 다시 올 수도 있지만, 그전에 먼저 <연서재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간간히 검색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의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내가 작은 도움이 되었을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가장 의미를 관통한 말은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작가가 어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시각적인 그림으로 효과를 극대화한 장르가 아닐까 싶다. 제주 여행 첫날 우연히 만남 주제넘은 서점이지만, 앞으로 더욱 주제넘어 주길 바란다. 잘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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