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잘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느낀다. 가족의 서포트를 받아 나 홀로 한국에서 보낼 수 있는 2주의 시간 동안 제일 큰 만족과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모르는 사람 가득한 카페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커피 마시며 플래너를 들여다보고 글 쓰고 책 읽는 행위를 할 때인 걸 보면 더욱 그렇다. 피부과, 헤어숍, 여행, 친구 만나기 등 할 수 있는 그 모든 신나는 것들을 제치고 말이다. 딱히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 그저 머릿속 맴도는 생각을 부족한 필력으로 끄적이기만 해도 너무 즐겁다. 누군가의 엄마, 어느 회사의 직원 등 모든 명함 내던지고 오로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언젠가는 쓰겠지 싶은 23년 회고에 자세히 풀어내겠지만 업무적으로 작년은 즐겁지 않았다.
“일이 재미없어. 회사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팀을 바꾸든 직책을 바꾸든 무언가 다른 걸 해보고 싶은데 요즘 경기도 좋지 않아서 선뜻 용기가 안나.”
누군가가 요즘 안부를 물어올 때면 자동으로 부정적인 어조로 답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분기에 걸친 프로젝트로 엄청 바빴지만 몸을 갈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시간을 보냈기에 성과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 친 상태였다.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 맞이한 23년 성과평가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매니저도 나의 충분히 성과를 내는 사람으로 봐주는 듯하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는데 혼자서만 비관적이었던 것이다. 휴가 전 매니저와의 일대일에서 결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스포일러를 들었을 때서야 다소 안도했는데 동시에 온갖 내면적 비난을 감내해야 했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닝루틴을 시작했던 2019년부터 꾸준히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자 많이 노력했는데 아직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한가 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23년은 버린 해라고 여겼다. 기록을 잘할 수 있었는데 못했고, 충분한 성장을 하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말에 우연히 접한 <유연함의 힘>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어떤 경험이라도 얻어갈 수 있는 배움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회피하고 싶었던 23년을 용기 내어 들여다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이런 감정 사이클을 반복했던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1. 내가 만들고자 한 성과와 나의 모습이 터무니없이 이상적이었다.
-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자 하나 단번에 되지 않음
-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코드에 바로 적용하고자 하나 충분히 파악하기까지 예상보다 많은 시간 소요됨
- 백엔드, 데이터베이스를 포함한 아키텍처를 전부 이해해서 우리의 니즈에 맞는 적절한 솔루션을 제안하고자 했으나 전문분야 밖인 현재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한계를 느낌
- 그 밖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문제보다 훨씬 더 큰 범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음
2. 타임라인은 타이트하고 부족한 버짓으로 엔지니어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고 프로젝트는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심적으로 부담감, 압박감을 계속 받았다.
3. 올해 처음으로 매니저를 하는 신입 매니저와 일하다 보니 매니저의 피드백에 대해 신뢰가 낮았다. 매니저가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때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로 들렸다.
4. 기록 부재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했다.
5. 멘탈이 무너질 때면 불난 집 불 끄는 모드가 되어 루틴이고 뭐고 모닝루틴, 플래너, 운동 식습관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 역시 무너지고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나-나>, <나-매니저>, <나-협업팀> 간에 기대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대치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갭이 확인되었을 때 나는 그 상황이 내 잘못, 내 책임으로만 느껴져서 내내 자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감사하게도 1월에 여유가 생겨서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를 깊이 성찰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짧게나마 작년을 회고했고 내 삶의 방향성도 점검해 봤다. 쓰다 말다 했던 플래너를 다시 각 잡고 작성하기 시작했고 지속해서 플래너를 쓰도록 돕는 소셜그룹인 이루리클럽도 다시 조인했다. 휴가 시작하기 전 매니저와의 일대일에서 승진 의사를 밝히며 이제 다음 승진을 염두에 두고 스킬셋을 쌓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닝루틴도 다시 시작했다.
건강하지 않은 감정사이클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나를 갈아 넣으며 회사에 기여를 하는 건 회사에게만 좋은 일이다. 특히 요즘처럼 연간 리추얼, 주간 리추얼처럼 반복되는 레이오프 소식을 접하다 보니 더욱 회사라는 공장의 하찮은 톱니 하나이기만 해선 안될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위한 기록을 다시 시작하며 '나'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