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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16. 2020

책 리뷰_<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진단하는 능력주의 사회의 치명적 단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도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이다.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학교에서 '정치이론 입문'수업을 배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적이 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기에, 이번 샌델의 신작도 큰 기대를 품고 보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능력주의는 완전히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지금 같은 갈등 지향적 사회에서 승자 독식 구조의 극단적 능력주의는 교정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책에 근거하여 샌델의 주요 주장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능력주의 자체는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논쟁이 되는 부분은 그 능력주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이다. 그 해답이 '기회의 공정성'인 것은 매우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샌델은 '승자와 패자가 취하는 태도'에 집중한다. 그는 과연 능력주의가 갈등 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한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책은 가장 먼저 능력주의와 포퓰리즘의 관계성을 다룬다.

베네수엘라의 '좌파 포퓰리즘'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도널드 트럼프와 니콜라스 마두로 등 포퓰리스트의 끝은 좋지 않았다. 국민들은 선거로써 민주 독재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사람들은 포퓰리즘의 원인을 특정 계층의 무력감과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노라고 말한다. 샌델은 그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는다.


 현재 미국의 통치방식은 시장 중심적, 기술 관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 두 특징은 능력주의의 기반을 가진다는 공통점과 더불어 각자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세계화를 수반하는 시장 중심적 통치는 분배의 정의 문제와 '정치 담론의 공동화'를 수반한다. 노력과 재능만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 논리는 더 이상 사회적 이동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더군다나 사회적 이동성은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또한, 시장주의는 국가의 역할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시장에서의 기회(공정성)와 책임(사회적 상승)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 책임 담론은, 기회가 평등하다면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사회적 상승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자기 책임 담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불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과, 단지 운이 없었던 사람 간의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기술관료들이 통치하게 되며, 과거 통치의 능력으로 평가되던 '공동선', '시민적,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자질이 기술 관료적 전문성보다 도외시되는 현상이 생긴다.  대학 학력은 무기화되고, 엘리트로 구성된 내각은 오만과 실수를 자행하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기술관료 정부는 정책결정권을 소수 엘리트에게로 돌려 '설득과 권유' 대신 '인센티브화'를 통해 정책을 결정한다.  왜 샌델 교수는 기술관료적 통치를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기술관료적 통치는 임의적으로 사실을 상정하고, 그 사실에 대한  토론의 의미를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우리의 의견은 사실 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을 이미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샌델이 예시로 든 '기후변화 논쟁'은, 여느 과학적, 전문적 이슈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성'을 띄기 때문에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을 무마시킨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남성 노동자 계층뿐만 아니라 현재의 통치방식을 고착화하고 유지한 집권 엘리트 계층도 포퓰리즘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시장 중심적, 기술관료적 통치를 통해 재생산하는 능력주의 시스템은 사회적 유대를 약화시키고 학력주의적 편견을 조성하며,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약화시킨다.  


 결국 능력주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앞서서 과연 능력주의 원칙의 실현이 정당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을 때, 능력주의 실현에 대한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이 커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실현된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1) 그리고 좋은 사회인지(2)에 대해 분석한다.



먼저, 능력주의가 실현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 선행되어야 한다.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했을 때, 그 결과는 정당하다. 문제는, 공평한 조건은 현실적으로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자유 헌정론>에서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평등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순수하고 형식적인 평등 밖에 없다고 했다.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유 헌정론>


 능력주의에서 평가받는 사람의 '능력'은 재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는 재능에 도덕적 지위를 부과하며 자유와 보상을 허한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경제적 보상은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내놓는 재화와 용역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보수일 뿐이라고 한다. 즉 이 보수는 본인의 한계 생산물(시장 성과)에 따른 정당한 몫(도덕적 자격)을 얻는 것일 뿐 우연하게 얻어진 재능에 대한 보상은 아니다.


 롤스는 아무리 사회적 우연성을 제거해도, 재능의 소유를 통한 불평등은 지울 수 없다고 한다. 그 대안은, 승리자가 그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이다. 그는 불평등하게 (우연히) 얻어진 재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이 시장 사회에서 거둔 성과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차등의 원리로 표현한다. 즉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 노력조차도, 시장의 보상이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롤스의 복지국가 자유주의는, 연대에 적합한 공동체를 인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하이에크의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롤스의 복지국가 자유주의 모두 정의를 논함에 있어서 능력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다음으로, 능력주의 원칙이 실현된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샌델은 '대학'과 '일의 존엄성'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대학은 무계급 사회에 대한 염원 속에서 등장했다. 즉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정당화하되, 매 세대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재분배가 일어나는 사회적 이동성을 바란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한다. 소수의 저소득층에게만 명문대로 가서 '고층부 엘리베이터'를 탈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 사회적 이동성이라는 대학의 사명으로 인해, 대학은 인재 선별 역할과 사회적 명망의 배분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선별된 인재들은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끝없는 경쟁 (불의 고리)에 뛰어들어야 한다.

 

 샌델은 시민교육 대신 인재 선별기가 되기로 자처한 대학 시스템에 대한 개선안으로, 능력주의를 최소화하는 방안인 제비뽑기를 제시한다. 어차피 학생들 개인에 대한 재능의 일반적 평가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므로, 최소한의 기준선을 마련한 후에는 추첨제의 미덕을 믿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대에 '운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능동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한 공립, 기술 교육에 대한 예산을 늘려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샌델이 대학의 위계를 뒤엎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좋은 사회는, '모든 시민은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 평등은 사회적 이동성을 보장한다는 측면의 평등과는 다르다.


 이제 일의 관점에서 보자.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다. 더 이상 공동선에 기여하지 못하는 투명인간이 된다는 두려움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암울하다.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간 일을 경제적 관점으로 보아, 사회 전체의 파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는 다원주의에서 몇 안 되는 가치중립적 논의이다. 이제는 정치 어젠다로서 '일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샌델은 노동자의 임금에 보조금을 얹어주거나, 금융분야에 세금을 더 매기는 방식으로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와 투기로 옮기는 방식을 제시한다. 이 세금의 표현적 차원은 공정성 담론을 넘어서 '기여적 정의론'으로 귀착되는데,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며, 이는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  


 능력주의가 보장하는 기회의 평등은 교정적 원칙일 뿐, 더 이상의 개혁이 필요 없는 완성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없다. '용'이 되어야만 '개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정의한 시스템을 우리는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이 말하는 대안은 조건적 정의이다. 그것은 막대한 부나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학습문화를 공유하며,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할 수 있는 평등이다. 민주주의와 겸손함은, 모든 구성원이 숙려 하는 정치공동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개인적으로 샌델이 중시하는 사회적 연대와 공동선의 개념에 큰 관심을 일으킨 책이다. 숙의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 명예와 위신의 재분배, 일의 존엄성 등 아직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강조가 책에 모두 드러나있다.



 능력주의가 과연 절대 완전의 원칙인지, 현재의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지 의심된다면. 능력주의가 개인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때로는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치철학과 정치 현안을 부드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논리를 탄탄하게 전개하는 샌델 교수의 이 최신작을 매우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능력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성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에, 다음 리뷰 책은 서병훈 교수의 <민주주의-밀과 토크빌>로 정했다. 위 리뷰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다.



*사진 출처(사진의 출처가 되는 기사들 모두 리뷰와 연관된 기사들이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01207/104322049/1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001224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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