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과현 Mar 22. 2020

나는 너랑 섹스할 안드로메다 소녀가 아니야

2017, 어린이와 문학 특집기획 어린이·청소년 문학에서 바라본 여성주의


대부분의 경우 나는 성에 대해 다루는 청소년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곳엔 ‘십 대의 성과 사랑’ 이 아니라, 십 대의 성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관념’이 있다. 진짜 십 대의 성과 사랑이 궁금하다면 차라리 인터넷 커뮤니티를 찾는 게 낫다. 위생적이고 안전한 자위 팁과 섹스 경험담을 나누는 회원 공개 게시판부터 섹스 파트너를 구하고 자신의 자위 동영상을 판매하는 섹컨계1)까지. 청소년들은 생각보다 훨씬 솔직하게, 욕망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고 있다. 오히려 지나치게 부족한 건 관련된 미디어 교육과 현실적인 성교육이다. 


여성 청소년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청소년’이기 때문에 가해지는 억압을 동시에 받고 있다. ‘미숙한’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성숙해지는 육체에 대한 정보는 원천 차단되면서 길거리의 시선 강간, 잦은 성추행, 몰카, 성차별적 농담을 공유하는 또래에 무방비로 노출될 때의 대처는 오롯이 그 여성 청소년의 몫이 된다. 이런 배제와 적극적인 격리 속에서 청소년들이 합법적으로, 비청소년에게 권장되는 방식으로, 아마도 유일하게, 성과 사랑을 ‘서사로써’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십 대의 성과 사랑을 다룬 청소년 소설 뿐일 것이다. 섹스가 대상화된 육체적 포르노에 그치지 않고 관계성을 포괄하는 그 이후의 삶을 보여주려면 필연적으로 이야기여야 하니까. 지금부터 살펴볼 『안드로메다 소녀』는 7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러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작가의 성비, 화자의 성비, 그 내용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지적되어 왔던 ‘청소년 소설에서의 왜곡된 성 관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필진은 ‘남성 작가 5명, 여성 작가 2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곱 작품 중 한 작품을 제외한 여섯 작품이 성인 남성, 남성 청소년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작품집의 이 기이한 비율, 특정 성별을 주인공으로 한 특정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이한 경향들을 앞으로 더 만나게 된다.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먼저 검토한 뒤 마지막으로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성 청소년의 육체를 향해 투사되는 욕망 




김도언 「갈증」 




‘주인공이 욕망하는 육체’로써 대상화된 여성에 대한 묘사는 남성 청소년 화자를 등장시킨 작품에서 유독 노골적이다. 16살인 이곤은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중학교 3학년이자, 시장 후보로 당선이 확실시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곤은 끊임없이 자신의 호기심을 ‘여성 육체’에 투사해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을 가진 자신이 곧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습은 남성들이 가부장제 속에서 받은 억압을 여성에게 다시 가하는 방식 그대로다. 성적 환상이라는 이름은 비윤리적인 여성관을 전시 하는데, 어디까지 면죄부가 될까? 「갈증」은 화자의 자의식 속에서, ‘육체 로서만 기능하는 여성들’을 계속해서 전시한다. 이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적 태도는 작품 전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오늘, 반드시 수미와 섹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아버지가 시장이 된 것을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다. 수 미와 자려면, 마땅히, 수미에게 남자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중략) 여자애의 다리 사이에 나 있는 그 엷고 가느다란 구멍에, 그 핑크빛의 협곡에 내 성기 를 문지르고 집어넣는 기분은 어떤 맛일까.”(32쪽)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여성 청소년의 기분은 어떤 맛일까.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해. 이현 오빠한테 이를 거야.” 이 작 품에서 ‘여자 친구’로 표상되는 여성 청소년은 남자 친구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서는 의견을 피력할 수 없는, 대뜸 성희롱을 당하고도 쌍욕 한 번 하지 않는 존재다. 김도언 작가2)는 작가의 말에서 “성에 대해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이야기”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성에 대한 엄숙주의를 타파하고 양지화하자.’라는 이야기는 원론적으로 옳은 이야기이나 앞선 소설을 읽고 나면 ‘여성을 대상화하는 잘못된 성의식을 성찰 없이 드러내는 일’을(그것이 상대 청소년에게 대단히 무례한데도 불구하고) 옹호해주는 듯 느껴진다. 


“성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죠.” 이 소설 속 남성 청소년 화자가 중얼거리는 성 의식이야말로 흉흉함 그 자체가 아닌가? 청소년의 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작가 자신의 성 관념과 인권 감수성을 스스로 짚어보아야 할 일이다. 




‘장난’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타인의 육체에 욕망을 투사하는 일’은 쉽게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성범죄’로 이어진다. 




김유철 「팬티」




 주인공의 반에 ‘영희 씨’라는 교생선생님이 온다. 내가 연 창문에서 불어 온 바람이 영희 씨의 치마를 들쳐버리자, 주인공은 반 아이들에게 추앙받는 순교자가 된다. 교생선생님의 팬티를 둘러싼 남학생들의 온갖 추측(희롱)이 계속되고, 주인공의 어머니는 사춘기로 접어든 외아들의 돌발적인 행동을 상담한다. 




“그냥 내버려 둬. 그 나이 땐 다 그런 짓을 하고 다니니까…….”(56쪽) 


“사실 협이 형도 작년에 거실에서 잠자던 작은누나의 치마 안을 훔쳐보다 큰누나한테 걸려 혼난 적이 있었다.”(57쪽) 




이 이야기는 이 시대에 더 이상 ‘몽정기’일 수 없다. ‘내버려 둘 수 있는 것’이 아닌 ‘내버려 둬 왔던 것’의 목록이자 ‘성범죄가 어떻게 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남자아이들이 벌이는 소동으로 용인되어 왔는지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결국 이런 ‘남성 청소년의 성에 대한 호기심’은 가벼운 관음적 욕망으로 용인되어온 ‘몰래 훔쳐보기’의 계보로 한데 묶인다. 범죄는 혈기 왕성함을 핑계 삼아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최근 대전 중학교에서 여자 선생님의 수업 중 남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자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3) 대전시 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 이런 행위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으며,4) 집단 성희롱임이 명백한데도 대전시 교육청은 “해당 교사를 대상으로 한 음란 행동이 아니라 영웅 심리에 따른 사춘기 학생들의 장난”이라고 판단해 공분을 샀다. 남성 청소년의 집단 성범죄가 혈기 왕성한 한때의 ‘장난’이자 ‘말썽’으로 수식되어 온 오늘날의 현주소다. 


김유철 작가는 「팬티」가 자신이 중학교 때 겪었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임을 밝힌다. 심지어 영희 씨라는 이름은 실존하는 당사자의 이름 이다. “선생님은 거짓말한 친구가 처벌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모른 척했다.”고, “사랑할수록 책임과 의무가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을 보 면서 나는 ‘사랑’, ‘책임’, ‘의무’로 감싸진 성범죄와 행간의 젠더 권력을 읽는다. 선생님은 정말 그 친구가 처벌받길 원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을까? 피해 사실을 호소했다면 작가의 회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작가는 이 일이 성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작품을 썼을까? 




주원규 「엑소 도둑」 




고등학생인 주인공 막구는 ‘엘프 정화’에게 티팬티를 훔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막구는 정화의 말을 “카이의 티팬티를 훔쳐 온다면 자기와 한 번 잘 수 있는 특별 사용권을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때 정화의 몸 은 ‘도구’의 사용권처럼 막구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막구는 “정화와 살아 숨 쉬는 19금 동영상을 찍”기 위해 결심을 다지며 소년원 동기 돌격대 에게 도움을 구한다. 요점은 엑소에 대한 정화의 애정이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도 순수한 마음으로 티팬티를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난 침이나 질질 흘리는 고딩 저능아들처럼 쭉쭉빵빵 한번 먹어 보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더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쓴다고 청소년의 리얼리티에 다가가거나 성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침이나 질질 흘리는 고딩 저능아’ ‘한번 따먹어 보려고’라는 말들은 돌격대가 아니라, 읽고 있는 장애인 독자와 여성 청소년 독자가 고스란히 듣게 된다.


 막구를 위해 희생한 돌격대는 건물 밑으로 떨어지며 큰 부상을 입지만 막구는 이를 외면하고 정화에게 달려간다. 정화는 티팬티를 확인하고 막구에게 ‘특별 사용권’을 지급해준다. 




“‘뭐 이런 여자애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막구는 고분고분 정화의 지시에 따랐다.”(213쪽) 




이 와중에도 성행위에 적극적인 여자아이는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냐 는 듯 유별나게 그려진다. 정화가 ‘비싼 값에 내다 팔기 위해서’ 카이의 티 팬티를 훔쳐달라고 했으며 ‘순수하지 않았음’을 깨닫자 막구의 성기는 서지 않는다. 


그 이후 이야기는 ‘순수한 남자아이들’의 우정으로 귀결된다. 막구는 돌격대가 입원한 병원에 들러 티팬티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돌격대는 그런 막구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국산 야동을 보여준다. 


한국은 야동, 즉 포르노의 제작·유통·배포가 불법인 나라다.5) 이때 돌격대가 보여준 야동은 불법 몰카이며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 디지털 성범 죄에 해당한다. ‘돈벌이를 위해 카이의 팬티를 팔면서’ ‘사랑하지도 않는데 섹스하는 여자아이’는 순수하지 않지만 ‘여자아이와 섹스하기 위해 가택 침입 절도를 저지르고’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불법 몰카를 보여주는 것’은 더없이 순수한 우정이자 뜨거운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 된다. 전자도 범죄이고 후자도 범죄이지만, 이 두 범죄를 그릴 때 작가가 누굴 위해, 어느 입장으로 서술하고 있는지 뚜렷이 보인다. 여성 청소년 독자는 이 기울어진 서술 위에 어떻게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하나? 


작가의 말은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제 실제 경험을 소재로 만든 이야기입니다.”로 시작한다. 두 작품이 모두 ‘작가의 구체적인 실제 경험을 토 대로 한’ ‘치기 어린 남자아이들의 웃픈 장난’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 ‘순수한 성적 욕망에 온몸을 던지는 일(실제 피해자가 생긴다)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여성은 외계인이거나 안드로이드거나




 여성 청소년을 그리는 방식은 ‘관음 되는 이상적인 몸’에서 그치지 않는 다. 관음 되는 몸의 저 건너편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낯설고 이질적인 몸이 있다. 남성 청소년이 ‘인간’이며 ‘비장애인’일 때, 여성 청소년은 ‘외계인’으로 ‘장애인’으로 등장한다. 




전건우 「안드로메다 소녀」




 미래를 그리는 SF야말로 현재의 관념적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는 장르가 아닐까. 소희는 우리 학교에 처음 전학 온 안드로메다인이면서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 눈이 부실 정도의 형광 피부를 가지고 250만 광년을 넘어 지구에 온 안드로메다인이어도 결국 “뭐라고? 이년이 미쳤나!”처럼 ‘년’으로 수렴되고, 로봇·인간이 공존하는 미래에도 어덜트 숍에서 성 노동을 하는 로봇은 “여자 로봇이 엄청나게 잘 빨아 준다는데 혹시 못 들었어?”처럼 남성이 아닌 ‘여성’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 


화자를 집으로 부른 소희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는다.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이끌었다. 소희의 과감한 행동이 짜릿하기도 했지만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진행 되었다.”(146쪽)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스킨십은 연인 사이에도 엄연한 성추행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는 서술에서 나는 이것을 데이트 강간으로 읽었다. 소희가 스킨십을 시도한 이유는 더욱 당황스럽다. “고마워서 그래. 너한테는 꼭 보답하고 싶었어.” 


전건우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루지 못한 짝사랑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누군가를 ‘아프도록’ 사랑한다는 건 참 멋진 일입니다.” 그 아픈 사랑이 실제 폭력일 수 있다는 염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세상에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사랑은 없으니까. 자신들을 괴롭혔던 무리를 응징 한 후 안드로메다인 수백 명이 새까맣게 타 죽는 사건과 함께 소희는 사라진다. 




“소희는 정말로 나랑 자고 싶었던 걸까? (중략) 소희는 나를…… 진짜 사랑했던 걸까?”(154쪽) 




여성 청소년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성 청소년 화자의 중얼거림은 덧없 기만 하다. 




박영란 「수지」 




“어릴 때부터 병신이라고 생각했던 수지”는 거의 2년 만에 만난 화자에게 스쿠터 뒤에 태워줄 것을 요구한다. 수지는 일곱 살 때 불타는 쓰레기통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 사고로 신경이 녹아버린 한쪽 다리는 의족인 채다. 화자는 “오작동 난 기계처럼 마구 떨어”대는 수지를 잡아주며 수지의 다리, 싸구려 의족의 진동을 느낀다. 


「수지」는 신지구와 구지구 사이를 오가는 ‘비정상’인 아이들의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정상’인 ‘사랑’을 그린다. 여성 청소년이 ‘인물’, ‘인격’으로서 움직이고, 여성 청소년의 육체를 남성 청소년이 최선을 다해 ‘같이’ 느끼려는 모습이 보인다. 작품집 안에서 유일하게 남성 청소년과 여성 청소년이 동질감을 느끼고 공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집을 연달아 읽다 보면, 어째서 여성의 육체가 묘사되는 방식이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완벽하거나’(수미, 영희 씨, 정화)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거나’(소희, 수지) 극단적인 갈래밖에 없는가 생각하게 된다. 이토록 ‘낯선 여성의 몸’을 남성 청소년의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 여성 청소년 독자는 언제쯤 내 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될까. 




어떤 성은 어른이 되기까지 유보해야 한다 




여기 ‘인간’이고 ‘비장애인’이지만 ‘정상’의 범주에서 쫓겨난 남성 청소년이 있다. 다른 성 지향성을 가진 남성 청소년들은 서사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정명섭 「어른 되기 힘들다」 


이 작품에는 30대 후반 남성 화자가 등장한다. 쉽게 청소년 화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려는 배려가 무색하게, 작품은 ‘퀴어’, ‘동성애자’라는 성 소수자와 그들의 성 지향성을 고정 관념 없이 다루지 못한다. 


화자 민준혁은 추리 소설가이자 국내에 유일한 탐정 모임의 일급 회원 이다. 민준혁은 ‘동섭이 엄마’에게 아들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수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동섭이 다니는 학교의 방과 후 수업 강사로 잠입한다. 


민준혁이 동섭의 성 정체성을 검증하는 첫 번째 관문은 ‘여자 친구의 유무’다. 동섭이 더 다양한 성 정체성, 성 지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제된 세계에서 민준혁은 동아리 SNS를 뒤진다. “올해 여름 신촌에서 열린 퀴어 축제를 찍은 사진”과 “누군가와 나란히 서서 팔뚝에 무지개 페인팅을 한” 사진이 있다. 민준혁은 이 사진과 동섭이의 옷차림을 맞 춰보고 쾌재를 부른다. 동섭이 입은 옷이 ‘게이핏’이었기 때문이다. 


게이 청소년이 입을 법한 옷차림, 스타일을 규정해놓고 그 외형으로 상대방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이 무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준혁은 “나는 강연을 하면서 동섭이가 정말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알아볼 예정”이라 며, 이를 ‘게이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게이와 레이더의 합성어야. 그러 니까 외모나 행동 같은 걸 보고 상대방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거지.” 동섭이가 ‘진짜’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감별’해내는 것은 오롯이 30 대 후반(아마도 이성애자인) 성인 남성 민준혁의 몫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시험하겠다는 발상 자체의 폭력은 아무리 경쾌한 탐정 소설의 문법 을 빌려와도 떨쳐낼 수 없다. 


이 폭력적인 정체성 감별은 더욱 빈약한 논리 위에서 기능한다. 민준혁 은 동아리를 담당하는 ‘마녀선생’을 “사랑은 증오보다 강하다.”는 퀴어 축제의 슬로건으로 떠보더니, 아이들의 사물함에서 “신촌 퀴어 축제에서 사 온 무지개 선글라스와 배지”를 발견했다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동섭이와 ‘K.Y’라고 불리는 아이만 동성애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사물함 안에서 모두 똑같은 선글라스와 배지들이 나왔더군요.”(178쪽) 




신촌 퀴어 축제에 간다고 모두가 동성애자면 갯벌 축제에 간 사람은 갯벌이 되고 빙어 축제에 간 사람은 빙어가 된다. 또 신촌 퀴어 축제는 ‘퀴어’ 축제이지 ‘동성애자’ 축제가 아니다. 


마녀선생은 동성애자였던 외아들 우식의 성 정체성을 당시 받아들이지 못했고, 외아들이 자살한 뒤 학교에서 우식과 닮은 아이들을 동아리에 모아, ‘괴짜’라는 소문을 내어 보살펴왔다. 민준혁은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이들이 차별과 폭력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험난한 싸움 을 하는 중이었다.”고, “문득 미안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이들’이라는 서술은 매일매일 SNS 에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고, 신촌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 하며, 무지개 배지를 사물함에 넣어두고 살아가는 동섭과 기윤 개인을 지워버린다. 이렇게 필사적인데도 ‘어머니’가 고용한 탐정에게 아우팅 당하는 동섭의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동섭은 결국 어머니 앞에서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넘긴다. 마녀선생과 민준혁의 논리는 동섭을 자기 결정권이 있는 주체가 아닌 보호해야 하는 ‘어린아이’로 만들며 동섭을 적극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일조한다. 가부장제 세계관 속에서 표준 남성 은 비장애인이자 이성애자여야 한다. 때문에 성 소수자 청소년은 ‘남성’이 아닌 ‘아이’이자 ‘청소년’으로 다뤄진다.




 “아이들에게 말했어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고요.”(182쪽) 




어떤 사람의 성 정체성, 성 지향성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봐야” 아는 것인가? 보호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진공 처리해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격리시키는 일은, 아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류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속박하는 일은 ‘차선책’이면서 동시에 안전을 위해 마땅한 조치라고 말한다. 억압을 정당화시키는 또 다른 기제가 될 뿐이다. 




섹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홀로 남은 여성 청소년 




김해원 「여수 여행」 


이 작품은 『안드로메다 소녀』에서 유일하게 여성 청소년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그래서 나머지 여섯 작품과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 준다. ‘섹스 후 임신해버린 데에 대한 책임’과 그 ‘죄악감’이 이야기 전체에 짙게 깔려 있다. 


화자는 “모두 다 내 뜻이었다. 성일을 사귄 것도, 그 아이와 잔 것도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 내 뜻이 아닌 건 내 배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생명뿐이 었다.”고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화자가 주체적으로 성행위를 결정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부른 배로 기말고사를 봐야 한다는 화자의 말에 엄마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기말고사? 미쳤구나. 아주 돌아버렸어. 정말 네가 엄마 망신시키려고 작 정을 했구나. 당장 때려치워. 학교에서 알면 개망신당하고 내칠 텐데, 그 꼴 당하기 전에 그만두란 말이야. 나쁜 기집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 가 정말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79쪽) 




엄마에게서 쏟아지는 폭언은 화자의 자기비하를 더욱 심화시킨다. 앞서 성행위를 시도하거나 꿈꾸거나 달성한 남자아이들이 이토록 경멸당했던가? 같이 섹스한 성일은 화자의 임신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화자와 헤어지고도 금방 새 여자 친구를 사귄다. 화자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엄마 말대로 그냥 죽어 버려야 하는 걸까.’ 생각한다. 




“내 배에 들어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공포였다. 내 자궁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공포는 점점 커져서 서서히 나를 삼키고 있었다. 고작 4개월밖에 안 된 것이 17년 6개월을 산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80쪽) 




십 대의 성과 사랑을 다룬 테마소설집에서 여성 작가가 쓴 단 두 작품만 이 ‘아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수지」는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 버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수 여행」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나’와 나 의 몸에 들어선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작가의 작품은 성행위가 쾌락에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잉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생명이 다시 어떤 성 정체성을 취득해 나간다는 흐름을 전제하고 있 다. 그런 맥락 속에서 여성의 성, 섹스를 동반한 사랑은 도무지 가벼워지지 않는다. 남성 화자들의 섹스(와 그 시도)가 모두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난다는 점과 지나치게 대조적이다. 


화자는 엄마와 여수에 간다. “엄마, 미안해.” 하고 사과도 한다. 화자에게 여수 여행은 “절대로 해피엔딩일 수 없는” 여행이다. 




“우리 착한 딸. 엄마는 너 때문에 살았어. (중략) 후회되는 일이 많아. 엄마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게 된 것만 같더라고. 다 내 잘못 같아서…….”(95쪽) 




화자의 죄책감이 엄마에게로 전이되면서 두 여성은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을 게장과 함께 꼭꼭 씹어서 소화시킨다. 여성 청소년이 겪게 되는 ‘성과 사랑’은 ‘아무리 씹어도 단맛은 나지 않는 쌉싸름한 삶’이다. 섹스가 휩쓸고 간 자리에 홀로 남은 여성 청소년에게 세상은 왜 이렇게 사나운가. 남은 여성들의 연대는 왜 늘 짠 바닷바람과 함께인가. 


나는 묻고 싶다. 십 대의 성과 사랑은 ‘정상적인’ ‘남성 청소년’의 것이냐고. 발칙한 욕망을 표현할 자유는 남성 청소년의 것이고, 성관계 이후의 책임, 임신, 낙태, 자기혐오, ‘죽고 싶은 마음’은 여성 청소년과, 연대하는 여성들의 것이냐고. 여성 청소년이 남성 청소년의 시선과 화법을 체화해 나갈 때 남는 것은 현실과 격차를 벌려 나가며 투영되는 ‘성적 환상’ 뿐이다.


 여성 청소년에게 자신의 ‘성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감각은 배제되어 있다. 남성 청소년의 온갖 몽정, 자위의 과정과 뒤처리가 묘사될 수 있다면 불시에 주르륵 흐르는 냉에 “아오, 씨발!” 하고 팬티 라이너를 가는 여중생도 그려질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성행위, 육체적인 감각에 대해서 특정 성별만이 그려진다는 건 명백한 문제다. 여름에 들러붙는 한방 생리대의 악취와 싸우며 “핑크빛의 협곡”에 남성기 대신 생리컵을 어떻게 접어 넣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이야기가 나오기까지는 한참 멀어 보인다. 


소외된 인물들은 글자가 아닌 행간으로 밀려나 있다. 자신을 ‘낯설고 비 정상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글자를 올려다보는 이 행간 속의 인물들은 언제쯤 자신의 글자를 가지고 지면 위로 떠오를 수 있을까. 


여성 청소년은 내가 성적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형의 여자 친구, 부임해 온 교생선생님, 거실에서 자고 있는 작은누나, 엑소 카이의 팬티를 훔쳐 달 라는 순수하지 못한 여고생, 어느 날 갑자기 250만 년을 날아와 지구에 이주한 외계인, 아들을 잃은 마녀가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내 글자를 갖는 연습을, 행간을 비집고 나와 말하는 연습을 한다. 




“나는 너랑 섹스할 안드로메다 소녀가 아니야.”





1) 섹스+세컨드 계정을 합쳐 부르는 말. 섹스를 위해 만들어진 부계정의 의미. 


2) 김도언 작가는 ‘문단_내_성폭력 피해 공론화 운동’에서 가해지목인이다. 절필과 자숙을 약속 했으나 피해 여성들이 요구했던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김도언_피해여성연대_문단내 성폭력(@wweww313_dada)) 


3) 「대전교육청 “중학생 성적 부적절 행위, 사춘기 학생들의 장난”」(아시아경제, 2017. 6. 28. https://goo.gl/bAfrWD) 4) 「중학생들 수업 중 집단으로 부적절한 성적 행위」(중앙일보, 2017. 6. 26. http://news.joins. com/article/21701852#none) 


5) 「성적 본능? ‘국산 야동’ 시청도 디지털 성범죄다」(여성신문, 2017.01.24. http://wwwwomennews.co.kr/news/111346)



70명이 좋아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청소년 없는 청소년 문학계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