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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끼리 만나면 벌어지는 일

"햇병아리 주제에!" B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나르시시스트와 나르시시스트가 만나면 어떤 파국이 벌어질까. 


B는 C교회 청년부 교역자다. 

그의 첫인상은 멀끔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엇나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한 모범생 같았다.    


교회는 장년층 위주의 사역이 활발했다.

상대적으로 청년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앙의 온도가 뜨뜻미지근했다.  

교회에 나오는 걸 문화생활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예배드리는 것보다 친목을 도모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부 사람들도 있었다. 


낡은 분위기를 타파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젊은 목회자와 올해 뽑힌 임원들이 의기투합해야 하는 시기였다.   


우선적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B는 장기 미출석자와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는 청년들을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B와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역을 주도해 온 멤버들까지도 앞다퉈 자취를 감췄다.   

교회 역사상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어느 날, B가 A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몇 주 전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는 K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말했다. 

K는 새신자로 시작해서 교회에 무사히 정착한 인물이었다. 

그는 찬양팀에서 싱어까지 맡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생일 축하케이크를 받은 K가 한껏 웃었던 날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A가 K에게 자초지경을 물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B의 태도가 처음과 너무 달라서 실망했다고 말이다.   

실망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A는 뭔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B의 언행은 교인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토요일마다 B는 리더 모임을 주관했다.

주일 전체 모임도 준비하고, 임원 회의도 진행하는 시간이다.  

모임을 시작하기 앞서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서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 그 시간에 B가 실언을 한 적이 있었다.  

모임 멤버 D의 외모를 부적절하게 평가한 것이다. 

“D는 몸매가 이렇잖아.”

그는 ‘이렇잖아’라는 말에 맞춰서 손으로 모래시계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리더들의 평균 연령은 20대 초반이었다. 

D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무척 당황했다.    


이후에도 B의 막말 퍼레이드는 계속됐다. 

교회 임원 A와 통화하다가 감정에 못 이겨 폭언을 한 것이다.


가끔씩 B는 주일에 일할 멤버들을 격려하려고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런데 A가 의도 없이 한 질문에 B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A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B는 상대가 싸움을 걸었다고 해석했다. 


B는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한 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방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다음 핸드폰이 아닌 교회 유선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비마저 투자하기 싫다는 거였나.   

A가 전화를 받자 B는 자지러지듯이 외쳤다. 

“햇병아리 주제에!” 


A는 이십 대 초반 성도였다.

B는 이십 대 후반 전도사였다.

저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한가?


그런데 이 표현에는 B가 차곡차곡 쌓아 온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시 B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일단 기존 핵심 멤버들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멤버들은 나가면서 분노와 실망감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B는 많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인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시기에 그도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드럼을 치던 E도 갈등 끝에 결국 교회를 떠났다. 

그는 무대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교회의 비전과 저의 비전이 맞지 않아서 떠나겠습니다.” 


그는 비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앞세웠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었다. 

사실 B의 무례한 태도가 근본 원인이었다.   


B는 설교하면서 특정인을 저격했다. 

그리고 교인을 스스럼없이 비난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성도와의 관계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회에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도가 생각보다 너무 적다 혹은 오래된 교인이 많아 적응하기 힘들다 혹은 화장실이 너무 개방돼 있다 혹은...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주로 보였다. 


그렇게 우리 교회가 별로인가? 

아, 아니다. 

이것도 관심인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우리 교회는 오래됐고, 바뀌어야 할 점도 많은 듯했다. 

하도 오랫동안 다녀서 익숙해진 환경이었다. 

그러니 새로 온 사람의 관점에서는 기존 교인들이 의식하지 않았던 단점들이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이런 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대상에서 특정인을 타깃삼아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해서 막말을 한 다음에 상황을 급하게 수습하곤 했다. 

부임한 사람에게도 낯선 환경일 테지만 교인들도 목회자에게 적응해야 하는 기간 필요하다. 

교역자와의 친분을 쌓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적 언어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게 힘들다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B는 오로지 내가 적응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교회의 비전과 저의 비전이 맞지 않아서 떠나겠습니다.” 

그 발언은 예배실 뒤편에 서 있는 B를 겨냥한 화살이었다. 


모두 E를 위해 찬양을 불렀다.

떠남을 아쉬워하고, 떠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찬양이었다.


A는 B가 신경이 쓰여 자꾸 뒤를 돌아봤다.

B의 얼굴은 모아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씁쓸했을 것이다.


햇병아리.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B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다.


그는 사역에 진심으로 임했다. 

하지만 마음을 담아내는 태도가 부적절했다. 


B는 상당수의 성도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심하게 여기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그는 고슴도치 같았다. 

다가가면 가시로 찌르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고압적 태도가 경악스러웠다. 

게다가 자꾸 짜증을 내는 그의 경솔함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사회에서도 용납해 주기 힘든 행동거지였다. 


멋대로 행동하는 그를 보고, 성도들은 화를 내거나 교회를 떠나버렸다.


B가 좀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좋을 뻔 했다. 

열심히 사역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사역에 사회성을 첨가해야 옳다. 

하지만 B는 그게 잘 안 됐다. 

성품도 좀 더 성숙하게 가다듬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부족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배척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탓했다. 

교인들이 자신의 진심을 몰라서 토라질 뿐이라고 가볍게 여겼다. 

그는 진심 어린 피드백을 경청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

B의 세계에서 B의 생각은 다 옳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특정인의 의견이 다 맞는 상황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B는 성도를 인격체로 인지하지 못했다.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봤다. 

당연히 청년들은 B의 자기중심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사태에 B의 실책도 한몫했다.


교회도 교역자를 잘 따르고, 리더로서 인정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교회에 오래 다닌 일부 성도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렸다.

B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하고, 곁을 주지 않았다. 

교회에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청년부의 실세였던 사람들과 교역자의 나이대는 비슷했다.

한국사회에서 나이는 민감한 영역이다.

나이가 비슷한 리더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녹록지 않았다. 

서로 기민하게 배려해야 공동체가 순항할 수 있다.  


청년부 사람들은 B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초반부터 B는 이 교회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했다.

그리고 매번 잘못된 점을 발표했다.   

변화하려면 필요한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매번 듣다 보니 상대도 힘들었던 거다.


부족한 점이 보이면 서로 독려하면서 서서히 바꿔나가면 된다.

의미 있는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단계적이고 점진적일 때가 많다.  

또 변화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시간에 많은 부분을 바꾸는 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다.


그리고 성별과 나이, 지위를 떠나 누구든지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게 가장 건강한 태도다. 

B는 자신의 말에 반박을 하고, 찌푸리는 사람들을 다 적으로 규정해 버렸다. 

상대를 비난하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가 많으니 다툼이 일어났다.  

관계가 깨져버린 것이다. 


희한하게 권력자가 권위를 휘두를수록 권위는 멋없이 추락한다.

권위는 신기루 같은 거다.  

언제까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는 한 장소에 잠깐 머무르다 때가 되면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는 방랑자다. 잠시 빌린 그 자리에서 언젠가 내려와야 한다. 

누구나 말이다.  


B는 사람들을 제단 하고, 물리쳐서 입지를 다지려 했던 걸까.  

그렇게 다져진 입지는 위태롭고 불편한 자리밖에 안 될 텐데 말이다.

그가 선민의식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B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 불안은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같은 거였다.

그래서 자신을 더 부풀리는 게 상황을 돌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성도들이 외면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안 좋게 말하고, 자신을 추켜세운다고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힘을 과시하는 누군가를 멀리한다.

그들은 남이 조금만 거슬리면 위협감을 느껴서 바로 돌변한다. 

자신의 영역을 뺏길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경계심이 많은 거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상대를 공격한다.

나를 경계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리고 이십대면 각자의 가치관이 어느 정도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다. 

그런데 B는 성도를 어린아이라고 오독했는지 팔을 걷어붙인 채 훈계조로 비난을 할 때가 많았다. 


B는 고압적이었다.

그리고 무례했다.

그 또한 일부 성도들 못지않게 배타적으로 나왔다.

 

타인에게 명령조로 구박하기.

비난하고 반박하기.

특정인의 외모 비하하기.

가차 없이 짜증내기.

고압적으로 소리 지르기.


목회자란 직분을 빼고도 누구든지 저러면 원성을 듣는다. 


B는 원망과 질책을 받으면서도 괴로운 마음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목회 자니까 말이다. 


성도를 무시하면서도 성도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극단적인 애정결핍을 앓았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감정들이 합쳐져 그는 절규했다. 

“햇병아리 주제에!”


이는 A에게 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성도 전체를 향한 원망이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

왜 내 의견에 반박해?

왜 내 말이 틀렸다고 해?

난 목회자가 되려고 대학교도 다시 가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 자리에 온 줄 알아?

나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잘 아니?

나보다 목회에 대해 잘 아니?

나보다 더 전문가니?

나는 알아.

나는 안다고.

그런데 왜 날 무시해?

너희가 뭔데?

너희가 뭔데?

나랑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지금?

나 진짜 상처 많이 받았어.

이런 꼴을 보려고 여기 온 줄 알아?

나는 그런 대접받을 사람 아니야.


B도 상실감과 외로움에 한동안 시달렸을 것이다.

분명 나는 다 옳은 소리를 했는데 사람들이 왜 찡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무너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많이 다독거렸을 것이다.


B는 청년부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B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되려 그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떠나갔다.


물론 B도 교회의 어떤 면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다.

예를 들면 F가 활개 치는 모습 같은 거 말이다.


F는 말괄량이 었다.

그는 중학교 때 조금 놀았단다.

일진은 아니었다.

노는 무리에서 서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또래들과 친해졌다.

공동체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그는 총무까지 맡게 됐다.

이런 과정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안 좋았다.


중고등부 수련회 때 일어난 일이다.

F는 당시 교회 임원이었다.


그는 수련회장에서 뭔가 준비가 미흡하다 싶으면 동생들을 불러냈다.

그는 동생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로 엉거주춤하게 섰다.

그런 다음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한 명 한 명에게 이렇게 묻는 거다.

“OO아,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뒷골목에서 돈 좀 있냐고 물어보는 ***처럼 껄렁한 말투로 운을 띄웠던 것이다.

그는 어린 마음에 군기 따위를 잡겠다고 학교 선배들에게 배운 못된 관습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같은 방식으로 군기를 잡혀 본 그가 경험을 살려 그걸 흉내 냈던 것이다.

(OO아, 그때 네가 한 짓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이제 좀 창피하지?)


F가 호명한 사람들 중에 그의 친동생도 포함돼 있었다.

F의 바람잡이에 그 친동생은 눈물까지 흘렸다는 후임담이 전해졌다.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윽박지르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하지만 어렸으니까.

그런데 어리다고 다 저러지는 않는데.


B는 교회 중고등학부 교사를 하던 F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알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아마 F의 호전적인 태도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좋은 의도로 찾아간 사람에게 도리어 그는 배타적으로만 굴었다.

B는 F를 교회 분위기를 망치는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어버린 거다.

결국 B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단다.

“너 같은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 안 돼.”


맞다.

이상한 허세에 중독된 모습으로는 교회가 오지 않는 게 더 나은 선택지였을지 모른다.

억울한 피해자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한 명 때문에 말이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F는 충격을 받고, 교회에 정말 안 나오기 시작했다.


이 에피소드로 A는 인간의 이면을 봤다.

이십 대 초반인 F는 친구들은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을 막 대했다.

그는 상고를 나와서 취업을 빨리 했다.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위기 속에서 상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썰물로 인해 바다의 밑바닥이 드러나듯이 위기를 겪을 때 인간은 감추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던 연약한 자아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


지금까지 F가 보여준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불필요한 기싸움을 하면서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나르시시스트 같은 행동을 꽤 많이 했다.


하지만 F는 보기보다 약했다.

목회자가 나오지 말라고 하니 그는 상처를 받았다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같은 교인이 아닌 교역자가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은 충격이었을 거다.


오랜만에 그가 청년부에 들린 적이 있다.

그때도 그는 쓸데없이 힘을 과시했다.

간식시간에 조용히 과자를 먹는 성도들을 한 명씩 지목하면서 껄렁하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B의 말을 받아쳤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 채 상처를 받았다며 교회를 떠났다. 

허풍만 세고, 맷집은 약한 종이폭군이었던 것이다. 


F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자아정체성을 찾으려고 일부러 사람들을 괴롭혔을지 모른다.

학교라는 좁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잘못 배웠을 수도 있다.

주변에 보고 배울 롤모델이 없어서 어설프게 어른을 흉내 내는 학교 선배들을 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F의 방식은 틀렸다.

타인과 나와의 관계성으로 자아를 만들어가는 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군으로서의 생존 기간은 무척 짧다.

사람들이 그를 언제까지나 봐주지 않는다.


인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신에 힘이 생기고, 자아가 확고해져 가치관이 정립되면 야만적인 폭언과 폭력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하게 폭군을 응징한다.


착한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는 타인을 역공격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 않으며 타인을 해치려는 악인도 존재한다는 걸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마 저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있으랴, 그래도 좋은 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실제로 존재한다.  

특히 나르시시스트 같은 악인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을 조롱하는 것.

악의적으로 놀리는 것.

무시하는 것.

싸움 거는 것.

배척하는 것.

욕하는 것.

때리는 것.

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은 살아있는 악 그 자체다.


선한 사람도 세상의 어두움과 냉혹함을 깨닫고 각성하면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정의감에 투철하게 악을 배격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선을 추구하면 남들보다 더 기민하게 악을 알아채는 법이다.


악행으로 얻은 자리는 결코 오랫동안 존속되지 않는다는 걸 악인들도 깨달았으면 한다.


그 사건 말고는 B가 상황이 맞지 않게 과도하게 반응한 건 맞다.


어떤 성도가 선교를 간다고 후원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런데 B는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마구 욕을 했다.

“거지근성이 있어!”

꾸준하게 헌금을 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성도에게 그런 막말을 하다니.

후원편지를 보낸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B의 태도는 보편타당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더 모임에서 D가 회장으로 발탁됐다.

B가 선택한 임원이었다.

그는 투표가 아닌 목회자의 지명으로 임원을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안목을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해 보니 D는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

뽑을 때만 해도 B는 D의 본모습을 잘 몰랐다.

그동안 D가 B에게는 우호적인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시밭길은 시작됐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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