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없이도 살아간다는...
빤히 보고 있는 사람. 길을 비켜 가려고 서로 움찔움찔 왔다 갔다 계속 같은 방향을 틀어 냈다가 이내 서로 목례를 나눈 후 각자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의 방향과 같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 선 후에 뒤를 돌아보질 못 했다.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은주의 냄새가 풍겨 왔기 때문이다.
현우와 은주의 시절은 그날 이후부터 급격하게 많은 이야기를 쌓아가기 시작했고, 은주의 인쇄소 방문은 눈에 띌 정도로 빈번 해 지고 있었다. 감리를 하러 오지 않는 날에는 현우가 은주를 향해서, 은주가 현우를 바라보며 둘은 같은 시절을 담아내고 있었다.
'현우 씨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참 어른 같네요. 일찍 독립이 되어 서 인가?'
'아네요. 가족에게는 조금은 이기적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많아요. 하고픈 것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씩씩하다. 가끔은 가족이 보고 싶겠어요.' 은주와 현우가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때 은주가 건넨 말이었다. 핀 조명을 비추고 있는 중년 남자와 여자는 부부인 듯, 아닌 듯 한 작품은 서로를 열렬히 바라보고 있고, 등을 돌려 다른 상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상반된 작품이었다. 현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 올리다가 갑자기 은주와의 자신을 반영해 보았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이 여자는 어쩌면 엄마와 아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현우 역시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어른이라고 여겨왔던 자신의 아버지가 떠 올랐다.
'현우 씨. 날이 쌀쌀해지네요. 우리 초코라테 먹으러 가요.' 은주는 현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곁을 내어주고 앉아 있는 은주와 현우 에게는 빛이 나고 있었다. 즐거움의 빛,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빛, 다른 이들이 알아 채릴 수 있을 만큼의 그들 만의 주머니가 사랑의 덩어리로 커져만 가고 있었을 때이었다. 시간을 내어 며칠 여행을 하자며 속닥속닥, 살아있음 을 느끼게 해주는 기분. 현우는 하루를 살아 내어야 했던 시절들의 배고픔 보다 은주와 함께 하는 짧은 하루의 배고픔은 참을 수 없었다. 같이 있어도 보고픈 사람이 있다는 것. 다음날의 월세 걱정으로 사랑 따위는 사치라고 여겼던 시절들. 여전히 현우에겐 베어있는 생활이 고달팠지만, 오늘을 열심히 살며 좋아하는 은주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굳건히 받아들일 용기가 생겨났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가 떠 올랐다. 자신들의 가족을 일궈가며 기쁨이 곧 의무감으로 변하였을 때, 나의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도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거라는 기쁨과 이것을 지켜 내기 위한 열심 으로 살아 가 보기를 마음 먹었다. 초겨울의 쌀쌀함은 둘의 온도로 온화한 온기를 만들어 냈고, 특별한 계획 없이도 뒹굴 거리는 시간들, 편의점 컵 라면과 삼각 김밥이 미쉐린 스타를 받은 메뉴처럼 느껴질 수 있단 것도. 오직 은주 와의 공간 안에서만 자라 날 수 있는 작은 씨앗들 이었다.
'여보세요? '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은주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내가 지금 밖에 있어서 문자 해줄래요?'
'누구? 중요한 전화 인가 봐요.'
'아네요.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 전화인데, 나중에 하면 돼요.'
기차 안은 일터로 다시 향하려는 주말 여행객으로 제법 꽉 차 있었고, 현우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은주에게 살짝 어깨를 기대인 채 황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은주는 현우의 어깨를 흔들었다.
'우리 이제 내려야 해요. '
'아. 계속 잠만 잤네요. 미안해요.'
'아뇨. 나도 오랜만에 피곤해서 졸았어요.'
현우와 은주는 짧은 포옹을 뒤로한 채 다시 보자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말랑한 여행 뒤의 은주를 볼 생각에 현우는 여느 때 보다 더 이른 출근을 서둘렀다. 멋지고 남자답게 보이고 싶었다.
-1. 은주 씨. 이따 봐요.-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하던 전송 문자의 '1'은 정오12시가 되어서야 사라졌다. 현우는 불안감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고 라도 난 것인지. 여행 에서 무리를 해서 아픈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음에.
- 1. 현우 씨. 걱정했죠? 내가 오늘 집에 일이 생겼어요. 이해해 줘요.-
아주 큰 일인가?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이해해 달라는 마지막 문자에 현우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수선한 월요일이 지나갈 즘에 현우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1. 걱정할 일은 아닌 거죠? 내일은 회사에서 볼 수 있죠?-'
-1. 아. 그럼요. 내일 봐요.- 휴. 하루의 피로감이 날아가는 듯했다. 현우도 며칠의 긴장한 여행으로 지쳐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평소보다 어두워 보이는 얼굴로 나타난 은주였다.
'은주 씨. 오늘 얼굴이 안 좋네. 어디 아파요? 너무 안 좋으면 일찍 들어가요.' 얼굴을 살피던 차장은 은주에게 말을 건넸다
'아네요. 차장님. 감사해요. 어제도 나왔어야 했는데. 일이 밀려서요. 괜찮습니다.'
곧 마감기한이 되는 일이 기에. 인쇄소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동료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으로 나가는 일은 당분간 미뤄둬야 할 만큼 일이 줄어들 틈이 없었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은주를 따라 현우는 탕비실로 갔다.
'아. 현우 씨. 걱정 많이 했죠? 여행 가서 좀 무리했나 봐요. 너무나 오랜만에 간 거라.'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은주를 안아주고 싶었다. 현우는 더 가까이 은주에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그때 은주의 귓불이 발그레 해진 걸 알아냈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은주의 손가락을 얹어 두었다. 사랑하고 싶었다. 그 순간.
'은주 씨!' 인쇄소의 누군가가 은주를 부르는 소리에 둘 은 무엇인가를 훔치려다 들킨 사람들 처럼 화들짝 놀라며 인쇄소 안으로 뛰어갔다.
계절은 저마다의 색과 깊이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서 있는 그 계절이 유독 아프고 혹은 아름다울 수 있음은 기억이 존재함 일 것이다. 우주의 신비로 불리는 하얀 눈으로 덮여 꽁꽁 얼어붙을 멈춰진 시간에서도 조차도 현우와 은주의 세계는 쉼 없이 그들만의 말랑한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각. 사각. 째깍. 째깍 크리스마스로 반짝이는 거리가 피어날 때였다. 따근한 국물이 생각난다며 들어선 가락국수 가게였다. 작은 가게 안은 연인 혹은 혼밥을 즐기려는 이들로 비워진 탁자가 보이지 않았다.
' 우리 다른 데로 갈까요? 자리가 없네요. ' 현우가 쓱 둘러보며 은주에게 말을 건넸다.
'.... ' 은주는 대답 없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누구 아는 사람 이에요?'
'아. 아네요. 그래요. 우리 나가요. ' 은주가 서둘러 현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이 들어간 곳에서 현우는 은주의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감지했다. 분명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무엇인가가 둘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은주 씨. 아픈 거 아녜요?'
'아네요. 오늘 회사에서 일이 좀 많았는데, 감기 오려나 봐요. 한기가 살짝 드는 거 같아요. 미안한데. 우리 오늘은 이만 일어날까요?'
바래다주겠다는 현우를 뿌리친 은주의 뒷모습을 한 참이 나 서서 바라보았다.
현우의 아버지는 자주 사주를 보러 다니곤 했다. 일이 잘 될 때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 자신의 운명을 되짚어 보거나 기대해 보는 일을 하였다.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가 전생과 후생을 말해 준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그저 신기하고 재미 있었기에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었다. 현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득 휴대폰의 사주앱에 접속해 봤다. , '그 사람은 나의 운명이 맞는 걸까?' 항목을 클릭하고선 답글을 기다리며 냉장고의 물 한 병을 꺼내와 앉았다.
'아. 역시..' 현우의 눈길은 휴대폰에 드러나는 메시지에 고정되어 한 참을 읽어 내려갔다.
" 이제 정말 떠나보내는 최소한의 노력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카드는 매듭을 풀고 밖으로 빠져나오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아픔은 더 좋은 인연으로 승화... 다만, 혼자만의 세상에서 마음을 닫지는 말아야 합니다."
며칠 동안 짤막한 일상생활의 대화만을 나누었던 은주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현우 씨. 내가 할 말이 있어서요. 참 좋은 사람과 아름다움의 시간들을 만들어 왔어요. 사랑을 받는 것이 이러한 것이란 걸 알게 해 준 사람도 현우 씨고요. 근데.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생겼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우 씨는 아직 젊고 더 많은 기회들이 있을 거예요.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전히 아프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 말이에요. '
평소의 은주의 말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하지만, 그날의 은주는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을 단호하고, 결정적이며, 한 껏 무게를 담은 묵직한 언어들 이였다.
그날 이후 인쇄소로 출근하는 은주와는 그저 목례와 눈인사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현우는 현우 대로 은주는 은주 나름으로의 각자의 시간을 견뎌 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우에게 인쇄소는 더 이상의 기쁨을 둘 수 없었고 은주를 바라보는 괴로움을 견디기에는 어려움의 장소였다. 기장에게 퇴직서를 제출하고서는 은찬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저 술 한잔 사 주세요.'
은주와의 풋풋한 시간들을 보내느라 가족과 같은 은찬형을 안 본 지도 꽤나 계절이 지났음을 알게 되었다.
볕이 드는 양지바른 곳에 개나리의 봉오리가 뾰족뾰죡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리 약속 장소에 나갔던 현우는 갓 내려 나온 진한 커피의 몽글한 크레마를 보며 은주를 떠 올렸다.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나도 당신의 손을 잡고 싶은데. 어째서..
'일찍 왔냐? 근데. 얼굴이 왜 이래?' 역시 은찬형이다. 형은 형이다
'형. 나 차였어요..'
'그때 말 했던 그 여자 말이야? 꽤 오래 만났었지? 좋은 사람 같았는데. 너 같은 녀석이 맘을 줄 정도면 말이야.'
'그 여자, 은주 씨였어요.'
'뭐라고? 너희 회사 감리 왔다던 , 은주? 내가 아는 형하고 사귀였단 그 은주라고?'
적잖이 놀란 은찬형은 벌컥벌컥 아메리카노를 들이 켰다.
'근데. 왜 내게 말 안 했어? '
'그때 말하려다가 , 시간을 놓쳤어요. 그리고 형이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
은찬형은 잠시 의자뒤로 앉았다가 다시 탁자로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현우야. 은주 씨. 그 형에게 돌아갔다..'
이제 현우는 알고 있다.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사람과 아픔을 돌보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현우는 조금씩 자신도 그의 부모처럼 현실을 위해 철저히 외면해야 하는 것들과 마주하는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