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어른이가 된다면.
그들의 하루의 마무리는 더위를 벗 삼고 맥주잔 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로 자정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은주라는 여자 말이야. 사실은 대학 때 아는 사이였어. 대학2학년 때 같은 과에 친한 형하고 사귀였거든. 몇 번 소개도 시켜 줘서 오며 가며 좀 친하게 지냈어. 거기서 일 한 다는 소식은 얼핏 들었던 거 같았는데..' 이야기를 뿜어내는 형의 얼굴빛은 달님이 한 참을 헤매어 자리를 잡은 새벽처럼 많은 감정을 숨긴 듯 보였다.
'오랫동안 연인 이였나 봐요.' 제법 마셔온 술기운은 온 데 간데 없이 궁금 중과 호기심으로 변해갔고 있었다.
'그랬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은주 씨 가 아깝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연인이니까 서로 애달프다가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랬겠지. 자세한 건은 모르지만, 형 하고 약혼 한단 소식 듣고선 둘의 행방은 그저 소문으로만 알았어. 그러다가 그 이후에는 형이 외국으로 갔다고 했었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우연히 인쇄소에서 감리로 오게 되어서 서로 놀랐었지.'
현우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이야기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 은주를 처음 봤던 느낌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두 청년의 시시콜콜한 대화는 어느덧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날의 술기운으로 늦잠을 자고 나서 후다닥 인쇄소에 들어오니. 감리를 보고 있는 은주가 보였다.
'오늘은 늦었네요. ' 유난히도 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은주였다.
'아. 네. 어제 술을 좀 마셔서..'
'계장 님. 오늘은 점심 같이 먹어요. 지난번에 짝 없어서 저 정말 서운 했어요.' 현우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차 계장에게 한 소리를 건넨다
'알았어요. 아이고. '
혼밥. 론러(loner)의 세월이 지겨워질 즘에 점심을 먹기 위해 우르르 한 곳으로 몰려 들어가는 직장인이 부러웠을 때가 많았다. 점심만큼은 반드시 혼밥은 피하고 싶었던 현우였으니까.
차 계장을 볼 때면 현우는 엄마의 안타까움이 떠 오르곤 했다.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 차계장의 손가락에서 엄마의 식탁이 그리워졌다. 엄마.. 나의 엄마는 잘 지내겠지? 한 번 전화는 넣어야겠다. 좀 살갗게 굴어도 볼 걸 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힘듦의 생각은 유독 한 사람을 향해 뻗어가곤 했다.
'요즘은 얼굴이 안 좋아 보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계장님?‘
'아이고 , 이제 늙느라고 그러는 거야. 나 여기서 15년째 일하고 있어. 기름 냄새도 좀 지겹기도 하고 일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여자 인생이란 게 참 그래. 현우도 잘해. 예쁜 여자 만나면 잘해줘. 마니 많이.'
'제 주제에 무슨 여자가 생기겠어요? '
'아. 우리 감리로 오는 은주 씨 어때? 차분하고 좋아. 그렇지?' 차 계장의 한 마디는 어제의 호기심을 다시 한번 끌어왔다.
'은주 씨 말이야. 성실하고 그만하면 예쁘고. 하지만 저마다 가슴의 상처 크기는 다 다른 거니까..' 차 계장은 은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의 시절을 같이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동화 같은 삶도 꿈을 꾸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 남자에게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후, 남자는 여자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면서 아픈 동생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버렸다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가자던 남자에게 무던히도 설득과 매달려 보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은주는 아직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지난 인쇄소에서 흘린 눈물이 떠올랐다. 가슴이 많이 아팠겠었구나. 맘이 변한 사랑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일방적인 상황으로 서로의 사랑을 돌려보내야 했다면, 다시 어떤 사람을 가슴에 담을 수 있을까?
오후 내내, 마음 한편에는 은주와 은찬형이 아는 그 형의 모습을 떠 올리느라 더위를 실감하지도 못한 채 하루를 마루리 해 버렸다.
현우아..
휴대폰 알림에 떠 있는 엄마의 메시지였다.
'더위가 만만하지 않은데. 어떻게 지내니? 힘이 많이 들지? 뭐라도 좀 보내 줄까?’
‘어. 엄마도 잘 있지? 나야 뭐, 이젠 제법 혼자 익숙해졌고, 밥 먹을 정도는 되니까. 건강한 거지?'
'응. 목소리 듣고픈데. 더위 조금 가시면 한 번 얼굴 볼까?'
'그래요. 내가 연락할게요. 잘 지내고요.'
아버지와 어머니. 내가 어른이 되고팠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전적 의미로의 어른이 ’‘이렇다 ‘라고 규범 짓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다른 어른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현우는 이른 어른이 되고자 했다. 적어도 가장은 이렇게 어른이 되면 안 된다고 아버지에게 대거리를 하고팠으며, 자신의 아이들과 같은 나이를 키워가고 가르쳐 온 어머니에게 다정한 남자가 되고픈 현우였다.
'오늘도 마감 인 가봐요. 출출한데, 바쁘지 않으면 나랑 간단히 가락국수 먹고 들어갈래요?' 은주는 거의 11시가 넘는 시간까지 감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맛있는 곳 아세요?''집 근처에 있긴 한데. 좀 걸어야 해요.'은주와 현우가 걷고 있는 시간은 다른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늦은 밤이지만, 술 한잔과 가락국수국물을 안주 삼아 있는 탁자에는 그들의 피로로 가득한 삶의 이야기들이 한가득 쌓여가고 있었고, 은주와 현우 또한 역시 말도 안 되는 희망 같은 것들을 내세우기도 하고 과거의 하지 못했던 후회의 말들을 내뱉기도 하며 아주 길게 밤을 나누고 있었다.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술기운인지 술에서 깨어난 것인지 은주는 입을 떼었다. 두서없이 이 말 저 말을 내뱉는 은주는 평소와는 다른 음성과 어색한 몸짓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깊고, 오랜 이야기인 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얘기는 보고파하는 그리움과 한편에는 미움을 섞어 공중으로 날려 버렸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비난과 질책으로 바닥 한 켠으로 내동냉이를 쳐 버렸다. 안아주고 싶었다. 은주는 살포시 현우의 어깨를 빌어 휴식을 취했고, 현우는 그때마다 자신의 가슴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적토마처럼 쿵쾅쿵쾅 거림을 알아챘다. 현우는 어깨에 닿아있는 은주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내어 주었다. 아주 짧지만, 강렬하게 , 이젠 다 괜찮다고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그만 잊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은찬형과는 이제는 떼어서 생각지도 못할 가족이 되어 버렸다. 가을은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기에 아주 적절한 계절이 아닐까 싶다. 은찬 형에게도 아버지의 존재는 늘 걱정과 한숨의 아이콘 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을 만큼의 재산이 존재하거나 재산을 뛰어넘을 만큼의 타고난 재주가 있다면 한 번쯤은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것이 인생이지만, 은찬형의 아버지도, 현우의 아버지 또한 그럴 만한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은찬 형과 현우에게 공통점이라 한다면 이른 어른이 되어서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에게 '호미문화 (Homie) '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현우는 그러한 은찬형이 참으로 좋았다.
'형. 나 누굴 좋아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