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이루지 못한 며칠
발그레진 뺨과 땀이 배어 나오는 얼굴을 감추려고 더 파고든다. 감싼 팔 아래로 더 깊숙하게.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 이다. 어릴 때는 생각지 못한 농도의 깊이는 전달되고 전도되어 몸 전체로 서서히 뻗어나간다. 하나 두울 세엣 을 새다 가빠진 호흡은 공중 분해 되었고 거뭇한 땅 위로 하얗게 피어나던 안개가 걷혀 버린다.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처 없이 계속 걸어 다니는 나는 분명
침대 맡 불빛을 두고 잠의 입구를 지나온 것이 분명하건만, 다시 눈이 뻑뻑해지며 이불 밖의 차가운 공기를 느껴 버리고 만다.
선잠과 단 몇 분, 단 몇 시간을 반복하며 아데노신의 양을 축척한 지 며칠이 되어간다
현우는 기를 쫙 빨린 듯 한숨을 쉬어 보지만, 결코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걷어 버린다면 다시는 잠의 세계와는 거리가 가까워질 수 없음을 분명히 알기에 계속 자신을 다독이며 달래 본다.
창문을 열어 본다
아!! 다행이다. 잠을 잤구나. 약 기운이었던 건지. 아주 깊은 심연에서 올라온 듯, 기분이 좀 나아졌다. 꿈을 꾸었다.
어제의 일 , 그저께, 일주일 전의 일 들. 몇 달 전의 일 들이 영사기를 돌리듯 스쳐 지나 갔지만, 가지런히 해의 색깔을 입고 밤을 견뎌온 하얀 커튼을 확 열어 제쳐 본다.
' 흐..ㅁ' 살아 있는 공기
반항 적이고 정의에 맞서 변화를 이끌어 갈 나이는 이미 세월에 묻혀 버렸고, 서른을 넘긴 청장년의 모습이 보였다.
'참. 나 나도 이젠 맛이 가는구나. 하하하.'
어이없음을 커피의 원 샷으로 넘기는 순간
' 앗. 뜨거워.' 이런. xx.'반사작용처럼 입을 통해 새어 나온 말에 또 한 번 실소를 터트려 본다.
'가만있자. 오늘 일정이...'
글 이 가진 힘을 알아차렸던 것은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등 시절이었던 거 같다. 어린 나임에도 하얀 종이 위에 자신을 피력하거나 감상문을 작성할 때 에도 글이 되던, 그렇지 않든 간에 한 바닥을 꿋꿋이 채웠다고, 어린 나이임에도 여백을 다 채웠다는 것에 학교 선생님들의 칭찬을 많이 들어왔다고 엄마는 전하곤 하셨다. 정서적인 음악과 책꽂이를 메운 책들은 현우의 부모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던 유산과 같다고 여겼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의해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생성되는 것이 개인의 역사의 가장 중심이 라고 본다면 현우의 일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생각이 떠올 를 때마다 끄적 대며 작은 노트에 맘을 적어 내려갔고, 음정을 붙여 흥얼 대어 보기도 했고, 아름 다운 글에 매료되어 꼼짝 않고 글을 읽어 내려 갔었다. 현우의 오롯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삼아 대학진학 또한 글과 평생을 먹고살아 야겠다는 결심으로 언론관련과에 지원했으니 말이다.
현우 자신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음을 느낀 것은 알바를 시작 하고 세 달 정도가 지난 즘 이었다. 육중한 기계음과 환풍기 소리. 코 끝을 건드리는 알싸한 휘발성 냄새. 눅눅한 종이 냄새 등이 친숙해졌고, 이 공간에서 만큼은 자신이 할 일과 해야 할 일이 주어지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듯한 뿌듯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이롤을 나르는 일은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장을 비롯하여 몇몇 직원과는 농담 섞인 이야기도 나누기도 했다. 기장은 무뚝뚝하고 말이 적었고, 직원들에게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출판사나 편집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종종 감리를 나오곤 했다. 은주였다. 루페(확대경)를 들고 있는 출판부 직원이라고 했다. 친근한 관계인 듯 자연스럽게 인쇄상태를 살펴보는 그녀였다.
'기장님.' 은주는 기장을 불렀다
'이 페이지에 그림이 조금 선명 치 않은 듯한데요. 한 번 봐주시겠어요?'
'아. 과장님. 이제 나도 늙었나 봐. 몇 번 확인 하긴 했는데....' 기장은 멋쩍은 듯 자식 나이 즘 되는 은주 앞에서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네요. 기장님 같은 분 들이 계시니 저희가 조금 편한 거죠. 실수 하나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 기계지요. 여러 군데 다녀봐도 기장님이 제일 꼼꼼하고 베스트예요.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갈색의 상의 니트와 블랙 정장 바지를 입은 깔끔한 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떠 났다. 기장은 담당 직원으로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큰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사무실을 나온 직원의 얼굴이 밝지는 않았다. 현우의 머릿속에는 결과물로서 보이는 책을 통해 넓은 세상을 알아가지만, 손에 들려지기까지 여러 사람의 복잡하고 세심한 과정으로 완성해 나간다는 사실에 소음, 가루와 냄새를 꽉 채우고 있는 무거운 공간의 모든 사람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르겠지만, 체온의 민감함으로 현우는 다음 계절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있었다. 아침의 창 너머의 햇살은 부드럽기보다는 따갑게 느껴졌고, 방바닥을 디딛는 발바닥에는 슬그머니 땀샘을 자극하는 열기를 알 수 있었다. 24시간의 돌아가는 기계들도 더위를 이기기엔 힘이 들어가고 있기에 에어컨까지 늘 복잡하고 힘겨운 기계는 더위와 더불어 작업소의 온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현우는 '하리코미'라는 인쇄 시 중요한 작업장으로 장소를 옮겨갔다. 큰 종이에 효율적으로 여러 장을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실수도 있었지만, 꽤나 매력적이고 섬세한 부분이 오히려 긴장감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어른이 되어 가야만 한다는 강박은 오랫동안 현우를 괴롭혀 왔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현장에서 일을 하기에는 좋은 장점으로 작용하곤 했다.
여름의 끝을 치닫는 8월의 중반 즘 오후에 은찬형의 문자가 왔다
날도 더우니 맥주라도 한 잔 하자며 현우의 작업장 근처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한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돈의 중요성은 무엇 보다도 우위이었다. 약속이 많지 않았다. 돈을 모아야 했고, 혼자서 살 아 내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곤증으로 눈이 반쯤 내려갔을 때, 어디선가 시끄러운 사람의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 아니, 차창님. 그러니까. 원래 회사에서 원 했던 색상은 이 채도가 아니었었는데요. 잘 좀 보세요.'
'우리 은주 씨도 맛이 갔나? 이게 어찌 달라 보여요? 내가 여기서 몇 십년을 일했는데. 그 색깔 하나를 구별 못할까 봐?'
'종이 재질에 따라 흡수율도 다른 거니까. 다시 한번 차장님이 확인해 달라는 거잖아요. 화를 내시고 그래요?'
'내가 그동안 말이야 수없이 감리 직원들을 만나 봤지만, 은주 씨처럼 깐깐한 사람. 처음이야. 뭐. 일을 못 하겠어.. 요즘 젊은 사람들이란 어디. 은주 씨가 그럼 해봐.'
작업장 안의 웅웅대던 소리도 은주의 흐느낌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신음만 내었다. 은주가 쓰고 있던 안경 사이로 흐르는 눈물은 창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금빛으로 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듯 작은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은주 씨. 미안해요. 차장이 요즘 집안에 아이들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픈 일이 있는 거 같아. 저런 험한 말 하는 사람도 아닌데 , 속상 하지? 나랑 차 한잔 합시다. 응?'
은주는 뭐라고 답을 하는 듯하더니, 자리를 빠져나가고 없었다.
'근데 넌 요즘 뭐 좋아 보인다. 일이 제법 잘 맞나 보다.'은찬형이 맥주를 따라 주며 얘기를 꺼냈다.
'알바 자린데 무슨 ,. 형은 일 잘 되지? 누나랑 은 아직도 잘 지내는 거지? 보기 좋아..'
'아직은. 하나 보단 둘이 좋을 때가 더 많긴 하니까~여기 일이 할 만한 거야? 답답해 보이긴 하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어떠냐?'
'응. 기장님도 잘해주고 다들 말없이 신경 쓰지 않고 일하는 거 같아. 아까 감리 오는 직원하고 한 바탕 소란이 있긴 했지만.'
'감리? 누군데?'은찬형이 물었다.
'은주?라고 들 하던데.'
은찬 형은 잠시 현우를 바라보고 서는 거품이 남아 있던 맥주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아. 그래? 아직도 거기에 다니는구나..' 말 끝이 흐려진 형은 하얀 거품으로 지저분해진 힘 빠진 맥주잔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