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그루의 시간

커피와 클래식

by 여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 아다지오 소수테누소

클래식의 마이너 선율은 소소한 사치가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너그럽고 관대하며, 자연스러운 세월을 뿜어내는 중년과 같다고 느꼈다. 몇 해 동안의 고민 끝에 마련한 커피머신으로 다가 선다. 현우다. 에스프레소의 버튼을 눌러본다. '우웅. 탁. 덜컥. 쫘약. ' 캡슐액의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다 빨아들여 버린 머쉰은 풍미 가득한 진한 커피 한 잔을 선사해 낸다. 잠시나마 훌륭한 어른이 되어 본다.


'괜스레. 문자를 했어. '

답글의 기다림은 벌써 몇 개의 광고성 문자를 지나쳐 갔고, 현우의 문자는 한 참이나 스크롤을 한 뒤에야 나타나 버렸다.

' 뭐 하러 물어봤지? 여하간. 참으로 그냥..' 며칠 전, 은주에게 건넨 문자로 인해 현우는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목 줄기를 타고 들어가는 커피를 천천히. 느리게 빨리 내려가지 않도록 붙잡는다.

'왜. 답을 안 하지?

쓸데없이 친절 해 가지고 그 여자가 잘 못 한 거야.. '

현우는 그해 겨울에 구입한 품질이 좋은 겨울 스웨터를 입으며 은주를 떠올린다.

포근한 캐시미어와 같은 웃음을 가진 여자였다고. 스웨터를 잡은 손의 감촉은 실 오라기 하나의 걸림도 없이 얼굴을 감싸고 들어간다. 미소 지을 때 살며시 올라간 은주의 입꼬리가 생각 난다. 목을 타고 들어간 스웨터의 온화함이 느껴진다. 몸통을 덮어 주는 따스함과 포근함은 은주의 체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홀로 민망한 얼굴을 해본다. 피식 웃음이 나 왔다.

' 야. 정신 차려.. 현우.'

그때

'웅 웅..' 휴대폰의 진동벨이 울린다.

'아. 형. '

'너. 어디야? 아직 출발 안 했지?'

'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 있지? 거기 공사 중 이라네. 다른 데로 가야겠다. 링크 보내줄게.'

현우가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이젠 카페의 커피 한 잔 정도는 걱정 없이 살게 해 준 형 '은찬'이다. 그저 부모의 걱정이 하염없이 서글프고, 같은 집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넛지 하는 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험한 세상에 겁 없이 뛰어들었던 그 시절, 알바 현장에서 만났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복사집. 인쇄소. 알바 사이트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갔던 곳. 부유한 어린 시절이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새벽의 찬 바람을 마주한 채 만난 얼굴들은 나이 주름을 가진 현우의 부모 보다 더 나이가 위인 어른들이 많았다. 현우와 동년배 혹은 그 위아래 즘으로 보이는 사람들.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과 한 공간에 있었다. 소장이란 사람은 그저 손에 볼펜 하나 즘을 쥐어 들고는 무언가를 외치며 안전교육을 하는 듯했다. 어느 드라마의 장면이 오버랩되는 듯, 이때 저 멀리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어이. 거기. 키 큰 청년.'

'네..'

'오늘 처음이지? 음... 아들뻘 이겠구먼..' 혼잣말을 되뇌는 책임자 같아 보이는 분은 인쇄기에 종이를 공급하는 일을 지시했다. 생각보다 어둡고 생각보다 육중한 기계들을 접하고 나니, 겁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롤페이퍼의 크기의 종이를 나르는 일이었다. 종이쯤 이야 하며 수월 할 거란 현우의 얄팍한 생각은 책상의 크기 즘 되는 스테이플러로 꾹 눌려지는 듯했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집에서 스쾃, 혹은 잠시 동네 뛰어보기에 그쳐 있었던 터라, 빳빳 하고 곧은 종이롤을 나르기 시작한 지 30 분 도 채 되지 않았음 에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내려 오기 시작했다. 부모의 생각. 참고서와 컴퓨터를 채웠던 현우의 따스한 방이 자꾸 생각났다. 잠시 털썩 주저앉아 기억을 헤매고 있을 즘에 무엇인가가 발밑으로 내 밀어 진 것이 보였다. 바로 '은찬형' 이였다.

'이거 마셔봐요. 이상한 거 아니니 걱정 말아요. 뚜껑도 그대로 예요. 찜찜하면 이따가 더 기운 안 날 때 마시던지요. '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도대체 왜 나에게 이걸 건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일어섰다. 앉았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인간의 직립보행의 역할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몸 안의 근육과 관절은 반나절이 지날 즘에는 더는 버틸 수 없음을 되뇌고 있었다. 기브 없을 외쳐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소장을 찾아 걸었다.

'저. 소장님.'

'어. 마침 잘 됐어. 말해 주려고 가던 참이었는데, 저기 사거리 보이죠? 가다 보면 같이 일하시는 분들 따라가요. 밥 많이 먹고 와서 몇 시간 더 견뎌 보지.'

본능. 인스팅트. 식욕 멈출 수 없는 끊임없는 욕구. 하나의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사냥 무리처럼 앞선 이들을 따라갔다. 허름하고 작은 식당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 코의 신경세포를 자극하며 들어오는 달달한 , 하지만 익숙하고 따스한 무엇인가의 이끌리듯 안쪽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두엽의 자극을 받은 허기짐, 침샘으로 그대로 몰려와 밖으로 웅성 거리며 튀어나올 것 만 같았다. 견딜 수 없다고, 어떠한 것이든 나의 오장육부에서 용솟음치는 이들에게 던져줄 먹이를 달라며 외쳐야 만 했다.

'오늘 첨 보는데, 배고프겠네.. 자. 여기 반찬부터 먹어요.'

올려 다 보지 못했다. 배고픔의 손가락은 무례하게도 허겁지겁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기에 바빴다. 보글보글 끓어 넘칠 듯 한 김치찌개는 현우의 나쁜 수저질에 횡포를 당하는 듯했다. 펄펄 끓어 입천장이 데일 듯했지만 , 아랑 곳 하지 않고 하얗게 올려진 밥과 찌개는 현우의 20여 년의 욕구가 어찌 채워지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배를 채우고 나니, 머리를 들어 올 릴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이 조금 났다. 옆 테이블을 둘러보니 아직 식사 중인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들 또한 당연한 일인 듯 관계치 않고 자신들의 허기를 책임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 배고픔의 욕구만 채우면 살 것 같았으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담배가 생각났다. 일어서려다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조심히 살며시 욕구를 채우고 난 후의 허탈함을 끼고 다시 회색빛의 건물을 향해 현우는 자연스레 걸어가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얘기를 건네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어깨의 촉감을 느끼고 서야 자신옆에 누군가 있음을 느꼈다.

'안전모 쓰라고. 계속 그대로 있으면 안 돼. '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전모를 쓰도록 권유했다.

'아. 맞다. 여기 인쇄소지' 현우는 오늘 일당이 얼마인지 생각이 났고, 하루 값은 반드시 받아야겠다 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오전의 관절의 역할에 다시 한번 부탁을 해 봤다. 허리. 손목. 어깨. 다리. 팔 시간이 지나가면서 묵직 해져 갔고 360개의 관절은 모두 다 살아서 너덜너덜 좀비 마냥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니는 듯했다. 현장에서 이골이 난 사람을 제외하곤 오전과는 달리 졸음이 밀려오고 근육의 나른함을 견디지 못한 몇몇 이들은 겨드랑이 아래팔을 모아둔 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후의 밝은 한줄기의 햇살은 압박과 긴장의 신경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저 그것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목덜미에서는 후끈한 느낌을 안고 손가락의 힘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무거운 뇌의 중량을 이겨 낼 수 없었는지 현우는 등을 한 번 쭈욱 폈지만,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작업대의 의자였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중력을 내려놓은 몸은 한 마리의 가벼운 새의 날갯짓처럼 잠시 허공을 날아올랐다가 살포시 깃을 내려놓고 깊은 잠의 세계로 탐험의 시간을 지내고 온 듯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몸을 일으켜 봤을 때, 영사기를 돌려 과거의 장면을 돌려놓은 듯 굉음을 내고 있는 무채색의 공간 그대로였다. 몸이 가벼운 자신에게 잠시 감사를 보내고선 현우의 하루 일당 채우기 작업은 계속되었다.

'오늘 수고했어. 내일도 올 거지.?' 소장은 말을 건네고 흰 봉투를 건넸다.


2월은 겨울과 봄의 경계 선 즘 되어 가니, 현장일을 하기에 아주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적당히 땀이 나면 운동한 듯 느낌도 들고, 지치고 삶의 바닥을 기어가는 듯 하지만, 일 년의 계획을 세워 나가기에는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저녁에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사가지고 나오려 했을 때, 창문에 붙어있는 '피티 30% 할인'의 문구를 발견했다. 구릿빛의 잔근육 아래에 근사한 몸매가 드러나는 모델.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돈 받고 자체 피티를 받고 있다고 자신을 위로하기로 하면서 현우는 폐쇄되고 모든 관심의 철저히 외면되었던 '검은그루' 자신의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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