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집은 광산 사택 우리 옆이었다. 가끔 씩 마을을 떠나는 가족이 종종 있었다. 어른 대부분이 막장 일로 먹고사는 동네 안가막골, 그곳을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웃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창선네 아저씨가 이사 가던 날 사람들이 좁은 툇마루에 모여 앞에 옆에 뒤에서 얼굴을 가운데로 들이밀며 환하게 웃는다. 사진기 앞에만 서면 왜 그렇게들 좋아했는지.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는다.
깜깜해서 앞산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먼저 잘 수 없어 허릴없이 누나의 방학 책을 들척이고 일기장에 몇 자 끄적이다 잠이 들었다. 깜깜한 새벽 누군가 부엌문을 두드린다. 동이 트기 전에 스스럼없이 찾아올 사람이면 옆집이나 뒷집 그도 아니면 정구네 엄마일 것이다. 엄마가 밖의 누군가와 나누는 얘기는 드문드문 끊겼지만 뭔 말인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병도네와 창선 아저씨네한테 모두 연락이 없었고 그러니까 밤샘 근무를 했을 거라는 말. 그렇겠지.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광부인 가족들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일이다. 금을 캐내야 광산이 살고, 아버지는 돈을 벌고, 그래야 우리 식구도 살아간다. 아버지 퇴근 때까지 조금만 더 자야겠다. 아버지는 금방 올겨. 광목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는다.
날이 밝았다. 오후 늦게까지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광산 앞 차부와 장에 갔다 온 분들이 소식을 퍼왔다. 광산에서 큰 사고가 났고 열댓 명 광부가 그 속에 묻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동네에 퍼졌다. 광산의 높은 사람 황 감독 아저씨가 돌아와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날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들은 대로 갱도가 무너져 내렸고 회사에서는 구조작업을 시작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도 전했다. 아, 굴이 또 막혔네. 그래봤자 뭐. 늘 그랬듯 아버지도 옆집 아저씨도 금방 돌아올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사람들은 송근이네 넓다란 마당과 덕원네 하꼬방에 모여 서성거렸다. 뭘 할지 몰라 어른들 말씀에 귀나 쫑긋거리며 심심하던 꼬마들이 산모퉁이를 돌아 광산 앞까지 떼거리로 몰려갔다. 차부 앞 고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서울 말씨가 깔끔하다. 고무신 국회의원, 미국과 소련 두 지도자의 만남과 윤보선 박정희가 어쩌고저쩌고. 모르는 말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 아버지 언제 꺼내줄 것인지 얘기는 도통 들리지 않는다. 하기야 옛날에도 그랬으니. 아버지는 갑옷 입은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세고 용감한 분, 사고가 나도 하루 이틀이면 꼭 돌아왔잖아.
으흐~음! 귀에 익은 잔기침, 영락없이 아버지다. 광산 갱도가 무너진 지 사흘, 날씨는 덥고 식구들 곤히 잠든 새벽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버지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발가락 냄새 물씬한 양말을 벗고 있었다. 별일 없지! 예, 근데 아버지는 괜찮아유? 말없이 웃는 아버지의 양쪽 눈 흰자위에 실핏줄이 시뻘겋다. 얼굴이 만화 속 임꺽정처럼 시커먼 수염으로 그득해서 그림으로만 봤던 원숭이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맨날 그랬던 것처럼.
쉬는 날 아버지는 새로 생긴 공중목욕탕으로 가끔 나를 데려갔었다. 뵈냐? 뜬금없이 묻는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점 일곱 개, 등뼈 왼쪽 엉덩이 위에 북두칠성 모양 비슷하게 박힌 반점이 선명했다. 그게 좋은지 어떤지 그땐 몰랐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삶이 고단하다는 뜻 아니었나 싶다. 그것도 대단히 많이.
곧이어 엄마가 문을 열었고 다른 식구들도 눈을 비비며 나왔다. 창선이는 아직 거기 있어. 분명히 살아있네. 목소리도 들었고. 나보다 아래쪽 배수장에 있었거든. 무너진 갱도 공구리가 워낙 단단히 막혀 구해볼 도리가 없었네. 맨손으로 뚫는 수밖에. 더 아래 굴에 갇힌 사람한텐 미안한데 앞에 보이는 사람이 급하더라. 하나씩 둘러메고 굴 밖으로 나왔어. 살아남은 셋은 병원으로 갔을 거야. 아직도 갇혀 안에 남은 사람은 어쩐다니. 아버지의 퀭한 두 눈이 잠깐 반짝이더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툇마루 아래 맨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창선 아저씨가 구조되기까지 그로부터 13일이나 걸렸다. 춥고 어두운 땅속에 홀로 남겨진 이 아저씨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16일씩이나 버텼을까. 들리는 얘기로는 도시락 두 개를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나눠 먹었고 오줌도 안전모에 받아뒀다가 나중에 썼다. 굴에 갇혀 열흘쯤 지나면서부터는 구조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전화선을 스스로 끊었으나 완전히 희망을 접지는 않았을 것, 살아날 목숨이면 나갈 것이고 죽을 팔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았을까.
내 얼굴 크기의 사진기가 펑펑 후라시를 터뜨리며 사각 유리창에 마을 사람들을 담았다.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소문에다 기자들도 매일 들이닥쳤고. 국가보상금으로 여유가 생긴 창선 아저씨네 식구는 어딘가 딴 데로 이사 간다고 했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귓방망이 한 대 얻어맞아도 시원찮을 얘기, 아버지가 창선 아저씨처럼 땅속에서 몇 밤만 더 있다 나왔더라면 보상금 얼마라도 받았을 거라는. 돈도 돈이지만 어린 마음에 적이 부러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속내를 어느 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행여나 그 말을 듣더라도 빙그레 웃어넘기겠지만 어릴 적 그때나 장년을 훌쩍 넘긴 지금이나 아버지 앞에서 나는 철딱서니가 없다. 돌아가신 지 꼭 30년, 가끔 이렇게 아버지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