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장모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곡(哭) 한마디 없고 빈소를 지키는 가족의 표정도 어둡지 않다. 옛날이라면 어른들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머나먼 길 떠나는 분 외롭지 않도록 시끌벅적해야 하고, 곡(哭)이 그치지 말 것, 해서 화투 치고 술 퍼마셔 곤드레만드레, 고성방가 삿대질에 쌈질까지 용서되는 곳이 내 기억 속의 상가(喪家)다. 영정 앞 큰절 대신에 국화 한 송이, 통곡 대신 고개 숙여 묵념이 최근 장례 문화의 대세가 되었나. 곡소리에 놀라 관 속에 안치된 고인(故人)이 벌떡 일어날 수만 있다면 형제나 자식 된 도리로 못할 일이 뭐랴.
연말부터 새해 벽두까지 3주간, 아홉 건의 부고가 날아왔다. 때 되어 돌아가시는 어른의 죽음이야 생명의 속성상 그렇다 치더라도 명색이 백 세 시대라는 21세기, 서넛 아래 후배의 부고 앞에서는 말로 표현 못 할 먹먹함이 일주일 넘도록 나를 짓눌렀다. 이 세상 영원한 것 없다는 대명제라든가 망자와의 친밀 정도는 차치하고라도 주변의 여러 사람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곁을 떠났다는 사실 앞에서 참담함을 넘어선 무기력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른 새벽, 전화기를 켠다. 또 한 장의 안타까운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故 최ㅌㅅ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오랜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책상 위에 OO 문학상 출품이라 적힌 짧은 글과 메모지에 적힌 선생님의 존함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전화기를 뒤져 연락 드립니다. 그간 저희 부친과 인연을 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얼굴 창백하고 시 좋아하던 동갑 친구와 그의 죽음 그리고 그가 썼다는 글 한 편. 마감 전 찾아온 임종 앞에서 그가 느꼈을 안타까움이 보이는 듯했다.
고등학교 동창의 죽음, 기분이 묘했다. 동기 몇 명에게 문자를 보낸다. 만사 제친 여덟이 고터역으로 모여들었고 늘 꼴찌로 와서 2차 술값 전담이던 친구가 먼저 도착하여 홀로 쓴 소주를 들이켜다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놈 장례식에 가지 않으련다. 나 죽거든 니들도 오지 마. 이럴 때 이런 애 달랠 말 찾기에 난 젬병이다. 조용히 건너편 자리에 앉아 소주와 맥주를 섞어 유리잔에 그득 붓고는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봄이 다가오면서 각종 문학상 공지가 활발히 나돈다. 백만 원부터 수천만 원에 달하는 상금 액수가 우선 눈길을 끈다. 이 돈이면 웬만한 책 몇 권을 낼 수 있는 금액, 싫을 사람 없고 나도 예외 아니다. 일정을 몰라서, 온라인 서류 제출이 까다로워서, 정해진 기간 내에 글을 완성키 힘들어서, 자신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로 참여를 주저하거나 접는다. 뽑힌다는 보장은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고 떨어져도 그만인데.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통해 글의 수준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은 덤으로 얻는 수확이다.
선배 한 분과 얘기하면서 알았다. 출품을 망설이는 원인 중 하나가 공모전 제출 사실을 남들이 알까 봐 부담스럽다는, 글쓰기라는 본질을 팽개치고 돈에나 관심을 둔다는 비난의 눈총과 구설을 피하고 싶은 자존심 그런 것! 이심전심 소심한 밀당(蜜堂)이 뒤따랐다. 제출 사실을 둘만의 비밀로 덮자는 합의 그리고 우리는 OO 문학상에 응모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양쪽이 서로의 의견에 대해 단 한마디의 반대 없이 의기투합한 경우가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공모전은 모집 분야와 기한, 제출 방법이 명시된다.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 태어나 살다 돌아가는 삶의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과에 따라 타인의 인정과 명예라는 보상을 받게 되는 점도 마감과 임종의 유사점이다. 차이도 물론 있다. 공모전은 떨어져도 다음을 바라볼 수 있으나 임종과 함께 인간은 세상과의 물리적인 관계가 단번에 마감된다. “삶을 마감하는 일 혹은 그러한 순간”이라는 한자어 ‘임종(臨終)’의 의미가 문득 새롭다.
많은 사람이 주변의 불행은 자신과 관계없다고 여긴다. 죽음도 마찬가지, 옆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도 연민의 시선을 잠깐 내주고는 여전히 자기 문제는 아니라 덮어둔다. 시점이 다를 뿐 모든 인간은 세상을 떠난다. 불멸은 판타지, 영생은 종교적인 수사(修辭)이며, 신화, 전설과 온라인 게임에서나 등장하는 허구일 뿐이다. 동갑 친구가 죽었다 해서 자기 생명도 끝났다고 믿을 바보는 없다.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이 죽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닌데도.
전화기 속 달력을 열어 OO 문학상 일정을 뒤지다가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잠긴다. 죽는 순서도 공모전처럼 심사를 거쳐 정하는 건 어떨까. 끝나면 또 다른 공모전이 기다리고, 죽을 듯 힘들었지만 살아있는, 그래서 다시 일어나 자판을 눌러 쓰고 고치고, 당장 뽑히지 않아도 다음번을 기약할 수 있다면야 환하게 웃는 영정 앞에서 눈물 훔칠 일, 마음 아플 일 없을 거잖아. 근데 문제네, 마감이 내일이래. 우짠다지. 아이다. 상관없어. 이건 임종이 아닌기라. 하모하모, 마감을 못 맞춰도 미끄러져도 괘안타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