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으로 들어선다. 빈 그릇으로 가득 채워진 싱크대 앞에서 한숨이 난다. 푸짐한 점심은 아니었는데! 동문 체육대회 때 받은 메밀면을 냉동실 여유 공간 확보 차원에서 처치하고 어제 남은 불고기 몇 점 데운 게 전부였는데 속된 말로 열 받는다. 뒤따라온 아내가 딱하다는 듯 입을 연다. 우리 둘 다 바빠서 아침 설거지를 안 했잖아. 결명자차는 하늘에서 떨어지나요? 호박죽을 먹자고 징징댄 사람은 누군데. 그래도 불만이다. 통장 잔액이 저만큼이라면 모를까.
영화 “인턴”에서 그랬듯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남자도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시대다.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떠맡겠다는 나의 결심은 시대의 흐름을 마냥 무시하기 버거워 선택한 나 자신과의 타협이었다. 어두워진 뒤뜰에서 야윈 매실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점들이 차가운 바람에 실려 나비처럼 춤춘다. 오후부터 시작된 눈발이 밤새 내리리라던 일기예보가 느닷없이 야속하다. 아무리 쌓여도 스스로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설거지도 그러면 어디 덧나!
상견례장, 전기밥솥을 선물하겠다는 집안 어른이 조카며느리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고모님, 우리는 그거 필요 없는데.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왜? 이거 최신형이야. 밥은 먹어야지!”
“햇반 있잖아요. 그거 질리면 오곡밥 김밥 쌀밥, 간단 앱 주문으로 배달까지 돼요.”
뭐래! 그러면서 스치는 생각, 설거짓거리 줄어 편하긴 하겠네.
그러나 햇반은 시작에 불과했다. 시집갈 딸을 둔 친구를 만나 전기밥솥 사건을 알려주면서 톡톡 튀는 세태를 꼬집고 싶었던 나의 건방은 그의 긴 탄식과 함께 댓바람에 쏙 들어갔다.
“그 정도면 양반이야! 우리 딸년은, 아휴~. 사위 될 놈까지 덩달아 소갈머리 없이.”
왜 집에서 밥을 먹느냐, 전기세 아끼고, 물값 줄이고, 힘 덜 들이고. 밥집 찻집 죽집이 널린 세상, 문명의 이기(利器)와 시스템을 활용하라는 딸애의 충고는 내게도 적잖이 충격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했지 체력 부실한 아내 대신 그릇 닦는 일쯤 쾌히 도와주리라 호기롭게 나선 시점이 7~8년 전, 미군 부대 주방 경력 육 개월이 믿는 구석이었다. 내친김에 덤볐다. 내가 익숙한 서양식으로 아침밥을 직접 준비하리라. 이 기회에 새벽잠 많은 아내한테 점수 좀 따자. 수십 년 넘게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온 나는 효율성 좋은 오전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다는 점이 덤으로 얻을 수확이었다.
옛날이나 21세기 현재나 설거지는 대체로 여성들의 업무였다. 삶의 질이나 인간이 어쩌고 따위 호사는 둘째치고 먹거리 구하느라 바빴을 것, 주변의 과실과 곡물 채취 작업은 여성도 가능했겠으나 야생에서의 동물 사냥은 체력적인 면에서 남성 몫이라는 가설이 훨씬 타당하다. 이런 이유로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육아나 집안 관리는 여성의 의무이자 책임인 양 확실하게 굳어졌을 테고.
할아버지 생전 5대 종가였던 우리 집은 제사가 많았다. 엄마 젊었을 적 푸념처럼 늘어놓던 “그땐~~~”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한 해 스무 번 이상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제사 하루 전부터 할아버지 댁에 모여 제수(祭需)를 준비했다. 온종일 누군가는 집안 어딘가에서 음식을 먹었고 부엌에서는 상을 차려댔으며 한쪽에서는 잔반(殘飯)과 빈 그릇을 뒤처리하느라 분주했다. 그런 고마움 때문에라도 상에 오른 음식은 남김없이 맛있게 먹을 일이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편리한 이 세상, 하루 두세 번씩 꼬박꼬박 달갑잖은 설거지로 왜 고생하는지 은근히 짜증 날 법하다. 밥상을 치운 지 얼마라고 밥때는 여지없이 또 다가온다. 다시 쌓여가는 빈 그릇과 음식 찌꺼기, 뭣보다 제아무리 열심히 치운들 생색이 나지 않는다.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당연하다고 여긴다. 3대 때로는 4대까지의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절, 선대 할머니와 며느리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피곤했을지 안 봐도 알겠다.
설거짓거리 없는 세상을 떠올린다. 아무리 쥐어짜봤자 안 먹는 것 외엔 답이 없다. 치우는 작업의 최소화 방법으로 얄팍하나마 햇반이 일시적인 대안은 되겠다. 일회용 식기와 포장지만 처리하면 그만이다. 김장도 필요 없다. 전화기 자판만 꾹 누르면 배달된다. 아랫세대의 선택이 어쩌면 지금껏 우리가 해온 방식보다 나을 수 있다. 그게 마뜩잖은 나, 내가 인정하든 말든 고루한 구닥다리, 소위 ‘꼰대’라는 부류로 이미 들어섰다는 증거일까.
특정 사회 구성원의 세상에 대한 시각과 취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요소가 문화다.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라는 이분법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흘러가는 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밥 말고 햇반이 있잖아.’라는 관점을 철딱서니 없는 예비신부의 단순함이라고 평가절하했으나 사정없이 이를 까부수는 한 방, ‘식사를 집에서? 집은 편안한 휴식 공간, 밥은 밖에서 해결해야지.’라는 그들의 획기적 발상을 반박하기 쉽지 않다.
외식 안 비싸, 햇반도 이젠 냄새 안 나. 뭔 소리냐 깔아뭉개다 그 주장이 마냥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가공식품보다 직접 만든 음식이 건강상 좋다는 그리고 외식이 집밥보다 비싸다는 인식이 잘못된 고정 관념이라면 과감히 버려야지. 그러나 쌀밥 대신 햇반을, 한술 더 떠 세 끼를 아예 밖에서? 새벽, 싱크대 옆 부엌 창 속의 어스름한 뒤뜰을 바라보며 쓰잘머리 없이 고민이 깊어간다. 밤새 쌓인 두 뼘 높이 흰 눈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