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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Apr 25. 2023

양말귀신의 신청서

말도 안 되는 단편소설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저히 양말을 숨길 수 없었다.


명색이 양말귀신인데 양말 한 짝 숨기기가 이리도 힘들어서야... S는 사라진 많은 귀신들처럼 양말귀신도 은퇴를 시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요즘 살림 사는 사람들은 양말을 너무 잘 정리했다. 애가 없는 집이 대부분이고, 남녀를 불문하고 살림에 목숨을 건듯 했다. 집이 정리가 너무 잘되어 있어서 양말을 숨기기 힘들었다. 심지어 어떤 집은 양말 널 때 짝을 맞춰 널었다! 식구가 적어지니 별 일이 다 있구나 싶었다. 하루는 양말 색이 다양한 집을 발견하여 너무나 반가웠다. 저렇게 정신없으니 하나는 잃게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집은 양말 주인이 양말을 애지중지하여 눈을 떼지 않았다. 매일 그날 신은 양말을 사진 찍어 자랑까지 했다. 가끔 살림이 엉망인 집도 있었다. 그런 곳은 양말을 숨겼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해 더 기운이 빠졌다. 그러면 일을 하고도 실적이 0이었다.

 

애를 네다섯 명씩 낳던 시절엔 여자들이 살림을 도맡아 했다. 식구가 많아서 양말은 같은 색으로 많이 샀고, 빨래도 매일 한 가득이었다. 양말을 짝지어 보관할 곳에 두면 아무나 찾아서 신었으니 마구 섞이기 마련이었고, 심지어 실내 불도 어두웠다. 돌볼 아기가 언제나 하나는 있기 마련이었기에 여자들은 늘 정신이 없었다. 식구들의 양말은 늘 부족했고 숨길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다.


S는 몽달귀신, 처녀귀신 집단이 차라리 부러웠다. 은퇴한 집단이건만 수가 점점 늘고 있어 단체 미팅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열었다.


10일에 한두 번은 성공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한 짝은 어디 간 거야? 바빠 죽겠는데!"


한 달에 실적 2~3개 적힌 연간 실적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니 행정체계에도 짜증 났다. 12월 말이야말로 사람들이 술 많이 마시고 양말 잃기 딱 좋은데 꼭 연간 실적 보고서는 12월 중순까지 취합해서 내라고 했다. 그것도 12월 남은 보름의 실적은 그해 월평균 실적을 반영하여 적으라고 했다. 손해가 막심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S는 사직서를 연말 실적 보고서와 함께 내기로 결심했다.


연말 실적 보고서를 내러 간 사무실에서 T를 보았다. 그는 피곤해서 보고서만 내고 빨리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요새 일이 많은 양말귀신이 있다고? 호기심이 자존심보다 강했다. S는 T에게 물었다.


"너 요새 어디서 일하기에 바쁘냐?"


 "구도심지역. 나이 드신 분들이 손주 봐주느라 양말 많고, 빨래 자주 하고, 바쁘잖아. 애들 짐도 자주 싸고. 애 없어도 건망증이랑 치매 많으시고."


S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급히 뛰어가 사직서를 버리고 서류를 한 장 만든 뒤, 사무실로 돌아가 연말 실적 보고서와 함께 제출했다.



<근무지 변경 신청서>

지역: 신도시에서 구도심지로

사유: 구도심지 양말 분실 수요 증가로 인한 실적 향상

신청자: 양말귀신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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