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망원동 반지하 생활
닭장 같던 기숙사에서 일 년, 방문을 자꾸 열어보는 사장이 있던 고시원에서 일 년, 원래는 모텔이었던 원룸에서 이 년을 살았다. 또 이사를 할 때가 되었다. 마침 동생도 하숙집을 나오게 되어 함께 살 집을 찾기로 결정. 여러 지역을 둘러봤지만 동생과 나의 통학이 모두 용이한 망원동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선선한 어느 가을날, 망원동에 집을 보러 갔다.
망원역 2번 출구로 올라오면 나오는 첫 번째 골목을 돌자, 저 멀리 만두를 찌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맘모스빵을 맘모스만하게 만들어 놓은 빵가게와 이천 원짜리 손칼국수 집. 낮은 담장의 1.5층짜리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까만 철문들 사이 눈에 띄는 초록 대문 집. 부동산 사장님은 여기가 반지하이긴 한데 그래도 지하가 깊지 않고, 창문도 커서 잠깐은 해가 들어온다고 소개했다. 대낮인데도 집이 너무 컴컴해서 거짓말 같았지만 일단 속아보기로 했다. 방 두 개 주방 하나. 고시원에서도 살았는데 이 정도면 괜찮다. 무엇보다 망원동의 풍경이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시장거리 장면처럼 어딘가 낭만적인 것이다. 후다닥 결정한 이사할 집은 반지하까지는 아니고, 좋게 봐줘서 1/4 정도 잠겨있으니 동생과 나는 망원동 쿼터 지하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루는 현관 문고리에 웬 검정 봉투가 걸려있었다. 세상에 워낙 엽기적인 일들이 많다 보니 봉투 안을 들여다 보기가 겁이 났다. 툭 건드려보자 꽤 묵직한 알알의 무엇이 들어있었다. 조심스레 열어본 봉투 안에 들어있는 잘 익은 밤. 그리고 ‘으심하지 말고먹어 우층 할매가 농고야’ 라는 귀여운 쪽지. 정성스레 내려쓴 글귀에서 포로리 같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까지 지어준 망원집이 사랑스러웠던 건, 이런 주인집 할머니 덕분이기도 하다.
망원동은 육중완이 ‘나 혼자 산다’ 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나는 육중완에 빠져있었다. 이 말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락페에 놀러 갔다가 처음으로 육중완을 봤다. 못생긴 얼굴에 꽃 같은 미소를 짓고서 내지르는 시원하고 거친고음. 노래실력은 폭풍 같은데 공연이 끝날 때마다 허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이상한 매력에 빠져버린 나는 무려 장미여관 팬클럽에 가입했다. 팬클럽 이름은 장기투숙. 망원동에서 씽씽이를 타고 빵긋 웃으며 지나가는 육중완을 볼 때마다 남몰래 두근하고 설레어했다.
4년 정도를 망원동 쿼터 지하에서 살았다. 그사이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밥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낭만의 콩깍지는 벗겨졌고, 주거환경의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다. 작은방 벽지 일부에 피어난 곰팡이를 방치했더니 점점 타고 내려와 벽의 절반 이상이 곰팡이였다. 이때 동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가 생겨 지금껏 고생을 하고 있다. 게다가 오래 살아서 짐은 점점 늘어나는데 사실상 큰 방 하나만 사용하다 보니 우리에게 프라이버시는 과분한 이야기였다. 결국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전날 밤, 동생과 작은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소원을 빌었다. 동생이 너무 간절한 표정으로 초를 불고 있었는데, 왠지 빨리 각자 따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 같았다.
“… 당분간은 힘들지 않겠어?”
앞 뒤 맥락 없는 내 말을 듣고 동생이 어떻게 알았냐며 빵 터졌다. 정말 나랑 따로 살기를 기도했구나.
아침부터 정신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주인집 할머니께 건강하시라 인사를 드렸다.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이제 가면 본인 살았을 때 또 못 보는 거 아니냐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진심으로 정주신 마음에, 지나갈 때 꼭 인사드릴게요 하고 빈 약속을 했다. 몇 년뒤 망원동 쿼터 지하 앞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드릴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혹시나 너무 늦은 방문에, 할머니의 눈물 어린 걱정대로 되었을까 무서워서 벨을 누르지 못했다.
할머니, 어디에 계시든지 안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