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을 보고
두 해 전, 큰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다음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다음이 아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초상이 너무 잦다며 아빠의 부고 소식을 다른 친척들에게 알리지 말자는 같잖은 소리를 하는 작은엄마와 큰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가족이라고 아등바등 인정받으려 애쓰던 아빠가 가여웠다.
“너거 아빠는 태어나지를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다.”
언제였더라. 확신에 찬 목소리로 큰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없으면 내가 없는데 어쩜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하나 싶었지만, 혼자 지내는 아빠를 잠깐이라도 들여다볼 사람이 큰엄마뿐이라 입을 꾹 닫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큰엄마 그래도 한 번씩 좀 챙겨주세요, 저희가 멀리 있어서…’라고 부탁의 메시지를 보냈었다.
장례가 끝나고도 처리할 일은 끝이 없었다. 두어 달은 매주 주말마다 동대구행 KTX 기차를 탔던 것 같다. 기차가 달리는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후회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있을 때 잘할걸. 진작 이렇게 올 걸. 그런 문자 보내지 말고 내가 더 자주 올 걸.’ 나한테도 그 정도인데 아빠는 무슨 소리를 듣고 지냈을까. 그 고약한 말들을 ‘그래도 가족이니까’ 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몇 달에 걸친 집 정리를 모두 마치고 아빠가 발견되었다는 거실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멎어가던 그 순간에 아빠는 우리를 생각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아빠는 그렇게 닮고 싶어 하던 큰 형과 같은 이유로 죽음을 맞았다. 똑같은 죽음이라니, 이렇게 보면 가족이라는 말만큼 징그러운 것이 없다. 무엇하나 괜찮지 않은 와중에 나의 유일한 위로는 동생이 함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영안실에서 아빠를 확인하고 나오면서 우리 자매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래도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가슴 시린 위로를 했다.
서른 살, 그렇게 죽음이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남의 것이었던 죽음은 아빠와의 이별 이후로 멋대로 내 일상 곳곳에 자리를 잡고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스쳐 지나가는 뉴스 기사도, 사내 부고란도 더 이상 완전히 남의 이야기일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일부러 답하지 않았던 마지막 카톡 화면과 아빠가 떠난 그 겨울날, 아무것도 모른 채 만들던 눈사람이 떠오른다.
‘가족이니까’라는 말은 때때로 폭력이다. 보고 자란 것 덕분인지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괜한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서로서로 벌거벗은 맨살을 기대고 온기를 나눠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좋은 가족’이라는 뜻 모를 것이 되고 싶다. 혈연이든 아니든. 뿌리를 나눠가졌기 때문에 누구보다 서로를 단단히 지탱해주는 동생. 서로의 맨살을 드러내고 온기를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 얼키설키 덩굴처럼 얽혀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 사람들에게 적당한 온기와 여유가 될 수 있기를, 호사스러운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