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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Oct 18. 2024

큰 힘엔 큰 OO이 따른다.

다음 보기의 단어 중 OO에 들어갈 단어로 맞는 표현은 무엇인가?

"큰 힘엔 큰 OO이 따른다." 

보기 : ① 권리(權利)  ② 부하(部下)  ③ 이해(利害)  ④ 책임(責任)  ⑤ 무리(無理)


한국어를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위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건 너무 당연하다. 

보기의 단어를 모두 OO에 넣어서 읽어보면 단 하나의 단어만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어의 마지막 글자에 받침이 없으면 '~이'가 아니라 '~가'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를 조금만 바꿔보자. 


다음 보기의 단어 중 OO에 들어갈 단어로 맞는 표현은 무엇인가?

"큰 힘엔 큰 OO이(/가) 따른다." 

보기 : ① 권리(權利)  ② 부하(部下)  ③ 이해(利害)  ④ 책임(責任)  ⑤ 무리(無理)


그러면 한글 표기법의 문제는 곧 의미의 문제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의미의 문제로 접근해서 풀자면 오히려 유일한 정답을 찾기 힘들게 된다.

어느 단어를 넣어도 정답이라고 주장할 만한 건더기가 있기 때문이다.


큰 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많은 특혜와 권리를 누린다.

큰 힘이 있으면 그 권력관계에 따라 부하들이 많이 생기게도 된다.

큰 힘이 있으면 그런 힘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이익도 손해도 크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케이스들을 따지다 보면 큰 힘을 가졌을 때, 보기의 단어 중 무엇 하나라도 따라오지 않는다고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내면서 오답 시비를 벗어나려면 정답을 하나로 압축시킬 수 있는 전제 단서가 분명해야 한다.


영화 '스파이더 맨 : 노 웨이 홈'에 나오는 대사 중, 큰 힘을 가진 슈퍼히어로가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한 내용으로 아래 대사의 OO에 들어갈 맞는 표현을 보기에서 고르시오? 

"큰 힘엔 큰 OO이(/가) 따른다." 

보기 : ① 권리(權利)  ② 부하(部下)  ③ 이해(利害)  ④ 책임(責任)  ⑤ 무리(無理)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단 하나의 정답을 고르기에 적합한 문제가 된다.

정답은 바로 ④번 책임이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사실 우리가 조직 내에서 흔히 사용하는 R&R이란 단어는 이 대사와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다.

조직 내에서 어떤 역할(Role)을 맡는다는 건 그 역할에 기대되는 책임(Responsibility)을 함께 갖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역할은 곧 주어진 권한을 행사해서 맡겨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너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런 대사가 수십 년을 두고 되풀이되며 영화의 리메이크 때마다 반복되는 명대사로 자리 잡은 건, 그만큼 힘과 책임의 관계를 짧은 글로 잘 전달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 속 명대사처럼, 

실제 생활에서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는가 생각해 보면 

지금 현실 속에서 보고 듣는 얘기들은 그저 실망스러울 뿐이다.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판사의 준엄한 판결에 담긴 힘에는 부정한 금전적 대가가 거론되고

사실을 보도하여 사회적 정론 형성에 기여한다는 기자의 글에 담긴 힘도 금전적 대가와 정파성에 따른 선택적 진실이 엿보인다.

숭고한 뜻을 가진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의료행위가 자진 힘에 이해관계과 덧씌워진 상황이 계속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모든 상황을 조정하고 수습해야 할 책임을 가진 정치인들은 

정치적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오로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힘자랑만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시절에는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얘기가 그리 큰 울림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그저 판타지 영화나 만화 속의 영웅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된 것인지, 

오히려 '큰 힘에는 큰 방종이 따르더라는 것' 같아 암울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큰 힘에 따르는 책임을 강조한 스파이더맨 만화와 영화 속 장면으로 돌아가보면 

한줄기 희망을 키워보게도 된다.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는 초인적 능력을 갖고도 슈퍼 히어로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가 그와 가까운 사람의 희생을 경험하면서 히어로의 책임을 인식하고 진정한 슈퍼 히어로로 각성하는 성장 과정을 겪는다.


지금처럼 큰 힘에 따르는 책임의 크기를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시대 속에서도

힘을 가진 누군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아 그로 인한 희생을 경험한다면,

혹시라도 힘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의 책임을 자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누군가 희생되어야만 그런 상황이 만들어질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극단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극적인 전개가 없으면 정말 누구도 책임에는 관심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더 무섭다.


그래 책임에 각성한 슈퍼 히어로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의 역할에 맡겨진 힘에 걸맞은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는 게 더 빠른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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