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랜덤초이 Nov 25. 2024

007 실패면허

요즘 들어 전쟁이나 스파이를 소재로 한 영화는 흔히 보기 힘들다.


하지만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소련이나 중공 같은 이름이 익숙한 냉전 시대라서 TV 속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 같은 외화 프로그램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나 스파이의 활약을 다룬 영화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미중 수교(1979), 냉전 종식(1989), 소련의 해체(1991) 과정을 겪으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서 인지 영화의 소재는 SF-공포-갱스터-코미디-로맨스물 등으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힐 만하면 꾸준히 찾아오는 역전의 용사 같은 스파이물이 바로 이안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007 시리즈다.


요즘 대다수 사람들은 007 하면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를 떠올리겠지만, 오래 전의 007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코너리',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 같은 배우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007 시리즈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극장에서 본 007 영화는 '티모시 달튼'이 연기했던 '007 살인면허'였다.

사실 30년도 훨씬 넘은 작품인지라 그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007+부제(副題)'로 명명되는 시리즈의 제목들 중에서 '살인면허(殺人免許 : License to Kill)'는 지금까지도 가장 생생히 기억에 남은 제목이다. 


면허(免許)의 사전적 의미는 '1. 일반인에게는 허가되지 않는 특수한 행위를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가하는 행정 처분' 또는'2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행정 기관이 허가함 또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


특정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인데, 그 특정한 일이란 게 떠올리기도 끔찍한 '살인'이라그런 부조화의 단어를 처음 접한 임팩트가 컸기에 아마도 가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제목으로 뇌에 새겨진 것이리라.


사람이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질러도 면책되도록 하려면 도대체 007의 역할이 얼마나 숭고하고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일까 하는 궁금함도 컸다. 아마도 어떤 악인 한 명을 희생시켜서 국민의 안녕과 국가 시스템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커다란 합리적인 목적이 있어야만 이 같은 면허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대상이 되는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자면 영화의 제목은 '살인면허'라는 게 실제로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우리의 상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에서 겪게 되는 실패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런 살인면허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김 부장은 A라는 프로젝트를 맡아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가 안 좋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부장은 이와 비슷한 B라는 프로젝트를 맡아 대충대충 일했고 마찬가지로 결과가 안 좋았다.


이런 경우 결과를 기준으로 책임을 지운다면 김 부장과 이 부장은 모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과정의 노력에 대해 정상을 참작한다면 김 부장에게는 새로운 프로젝트 기회가 주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부장에게만 실패와 상관없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 반복된다면, 

조직 내에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를 면책받는 '실패면허'가 있구나 생각될 때도 있다.


열심히 일했거나 심지어 성과를 만든 사람마저도 인사의 칼바람에는 낙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유독 특정인에게는 그런 통상적인 기준이 벗어난다면 그건 뭐 '실패 면허' 보유자라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이해할 도리가 없다.


진짜로 그런 면허를 가졌는지는 뒤에서 수군수군 대다가 시간 가면 잊히게 마련이니 '실패면허'는 '살인면허' 만큼이나 은밀한 자격인 셈이다. 


스파이에게 주어지는 '살인면허'는 '국민의 안전'이나 '국가 체제의 보전' 같은 대승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표현되니 그래도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을 위험에 빠트리는 '실패면허'에는 대체 어떤 대의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몰랐냐 그 사람이 누구누구 아들이래" 혹은 "누구 후배래" 같은 이유 말고, 정말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면 보다 더 잘 알려져야지 싶다. 

그게 어쩌면 실패의 결과를 함께 나누어야 하는 동료에 대한 예의가 되지 않을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