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여러 판단의 순간마다 상식이란 것은 꽤 유용한 잣대로 활용된다.
직장 동료 세 명이 점심식사를 하러 중국집에 가서 각자의 식사를 시키고, 서비스로 군만두가 나온 상황을 가정해 보자.
군만두 8개가 한 접시에 나오면 몇 개씩을 먹어야 할까?
아마도 2개씩은 균등하게 나눠먹고 나머지 두 개는 잘라서 나누거나 눈치껏 배려하여 누군가에게 양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9개가 한 접시에 나온다면 한 사람이 3개 싹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함께 식사하는 세명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니까.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양해를 구하는 일도 없이 혼자서 4~5개를 먹어치운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 자리에서 몰상식한 사람이란 말을 듣거나 같이 식사하기 싫은 그런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자리 잡은 상식의 존재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유용한 기준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렇듯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상식도 늘 옳은 기준으로 유용하게 작동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1992년 방영된 TV드라마 '아들과 딸'은 당시 만연해있던 남아선호사상을 소재로 다뤘다.
드라마 속에서 이란성 쌍둥이인 7대 독자 '귀남'이는 늘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좋은 대우를 받았고, 딸인 '후남'이는 차별받으며 천덕꾸러기인 신세였다.
만약 지금 이런 내용의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장면들이 많이 나왔었지만,
당시로서는 남아선호사상이 해체되어 가는 전환기였기에 이전 세대의 상식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실제의 생활에서 경험했고 또 경험했을 법한 일들이 소재로 각색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크게 히트한 드라마가 되었다.
더 멀리 시선을 옮기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상식의 이름으로 행해진 경우도 많았다.
16세기 이전까지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게 상식이었다.
19세기 초중반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를 부리는 것이 합법적인 상식이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조차 여성의 보통선거 참정권은 1984년 미시시피주에서 법적 승인이 마무리되고서야 전국적인 완결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상식이란 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유일하게 정의로운 기준도 아니다.
만약 아무도 상식이란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처럼 발전해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패한 기업인수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자 누군가는 나에게 말했다.
원래 M&A는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그게 상식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게 상식이라고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일하지 말았어야 했고,
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고...
아무튼 다수가 인정하는 상식을 거부하는 대가는 크다.
다른 다수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다는 것은 아주 괴로운 일이다.
다수가 실패나 실책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단아나 돌아이를 무시하는 게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타인의 상식을 인정하지 못할 때 마주해야 하는 건 침묵의 절벽이다.
철저한 무시와 묵살을 경험하며 그런 결과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다 보면 자존감과 자아는 피폐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국 진나라 시대의 간신 조고는 황제에게 사슴을 구해 보이며 귀한 말을 구해왔다고 얘기했다.
황제가 어이없어하며 '이건 말이 아니라 사슴이 아니오?'라고 묻자 조고는 다른 신하들에게 자신이 끌고 온 짐승이 말인지 사슴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때 말이라고 대답한 자는 살고, 사슴이라고 솔직히 얘기한 자들은 모함하여 내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나의 상식은 사슴은 사슴이고 말은 말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슴을 말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는 게 상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상식은 특별법처럼 나의 일반법 같은 상식에 우선하는 것이었나 보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상식도 언젠가는 그 효력을 다하는 시기가 온다.
그런 때가 오면 '그래 그건 사실 사슴이었지' 하는 일반적인 순간이 오지 않을까?.
"Let us not become weary in doing good, for at the proper time we will reap a harvest if we do not give up" (Galatians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