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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Nov 28. 2024

절반의 정의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이라고 할 만했다.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도대체 다음 영화에선 이 거대한 답답함을 어떻게 해소해 주려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수많은 유튜버들이 뇌피셜을 바탕으로 예측 영상을 만들어 해법을 제시했지만 

‘어벤저스 엔드게임(2019)’이 개봉되기까지의 일 년여 동안 나의 갑갑한 마음은 계속 커져만 갔다. 

제발 우리 편이 다시 일어서서 저런 무지막지한 타노스에게 복수하기를 희망했고, 

사라진 영웅들이 되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결국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마지막 대전투 씬에서 절망적 위기에 몰린 캡틴 아메리카에게 무전이 잡히고 ‘On your left’란 교신과 함께 열린 포털을 통해, 사라졌던 동료들이 나타난다. 

이 모습을 확인한 캡틴이 묠니르를 들고 ‘어벤저스 어셈블’을 외치던 장면은 마침내 터져버린 눈물과 함께 1년 넘게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나의 답답한 마음이 쾌변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쉽게 가시지 않는 감동의 여운을 즐기려 여러 분석 영상을 찾아봤다.

양자역학이 어떻고,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뭐고, 멀티버스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해야 한다지만 그런 복잡한 내용은 그냥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잘 공감하게 되는 정교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 마블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saga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겨우 5년 여가 지난 지금, 다시 되돌아본 MCU 왕조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압도적인 티켓 파워는 온 데 간데없고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 속에서는 과거의 영웅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치 타노스가 다시 나타나 핑거스냅이라도 튕긴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식어버린 사람들의 관심을 느끼다 보면, 혹시 내가 어느 순간 다른 멀티버스로 옮겨져서 살고 있는 건가 느껴질 정도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MCU가 망가진 이유를 찾아 여러 가지 분석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미 내 관심에서 멀어진 상황이라 그런지, 나는 이제 더욱 그런 이유를 찾아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이 불필요했다.




귀찮아서 혹은 불필요해서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나는 과거 MCU에 빠져있었고 지금은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롤러코스터 같은 추앙과 무관심의 과정을 경험해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하게 진영에 매몰되어 일희일비하고 있는 요즘의 정치판에 대한 분위기도 어쩌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감정과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10여 년 전 나의 친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세월호 사고의 배후 규명을 부르짖었다.  

고의침몰설의 증거라며 '오렌지맨'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나는 그 친구에게 네가 예전에 그렇게 주장하던 '오렌지맨'의 정체가 뭔지 이제는 알았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나를 실망시킨 그의 대답은 '정체를 알았다'거나 '아직도 모른다'는 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주장을 했던 사실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MCU 영화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려 하지 않고 또 불필요하다고 느껴 외면한 상태로 무관심해졌던 것처럼, 내 친구 역시 무슨 이유로 뜨거웠다가 다시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게 차가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생각해 보자면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은 그들 스스로의 생각과 주관에서 오롯이 비롯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맥락에 스스로를 끼워 맞춰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니버스 내부의 확증편향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런 확증편향의 유니버스가 영원히 지속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닐 때면 사람들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고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은 혼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변한 것처럼...


나는 세상에 완벽한 악인도 100% 선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를 판단하려면 누군가를 믿을 때 영화 '넘버 3'의 한석규 대사처럼 51%쯤 믿다가 다시 49%쯤 믿다가 하면서 언제든 스스로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누군가를 100% 믿다가 배신당하거나 실망하게 되면 그로 인한 상실감과 충격이 너무 크고 그래서 자기의 잘못된 믿음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와 관계없는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내 모든 것을 맡겨서 살지는 말자.

그렇게 딱 적당히 50% 언저리에서 사람을 믿고 의심하며 조금만 상처받는 그런 삶이 어떤가 싶다.

그러면 적어도 믿음을 이용해 거짓과 위선을 주입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절반 정도의 정의는 남아있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타노스가 할 일은 절반의 사람들을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절반의 믿음만 의심으로 바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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