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책 읽기를 좋아했던 어릴 적의 나는
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읽었었다.
어머니가 책장 가득 사서 꽂아 두셨던 창비아동문고, 세계 위인전, 한국 위인전, 전래동화집 같은 문고판 도서들로 시작해서 용돈이나 세뱃돈이 생기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읽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은 시대였으니 책은 나에게 다른 세상과 생각을 보여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의 허세였는지 모르겠지만 또래가 읽던 책보다는 좀 더 작은 활자의 두꺼운 책을 사서 읽으면 내가 좀 더 우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신문에 소개되는 추천도서와 문학상 수상작, 그리고 서점에 소개된 서평을 찾아 이런저런 책을 사서 읽으며. 그렇게 나는 독서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고등학생이 되어 수험생활을 겪은 후, 대학의 자유에 취하다가 또 군대도 다녀오면서 어느새 나의 독서량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독서의 양이 줄은 것도 아쉽지만, 보다 아쉬운 건 독서의 영역이 좁아진 것이었다.
어릴 적에는 오히려 분야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동물도감이나 백과사전 같은 책에도 관심을 갖고 접근했던 내가, 나이가 들어서는 도파민 터지는 추리, 무협, 판타지 소설 쪽으로만 취향이 굳어져 간 것이었다.
독서의 질과 양이 모두 퇴보한 듯한 상황에서 집중력 저하와 노안은 독서에 다시 취미를 붙이기 힘들게 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배출이라는 국가적 영예에도 불구하고, 점차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고 있는 것은 아쉬움이 큰 부분이다,
사람들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인상이 아니라, 저마다 텍스트를 읽고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상상해 만들어내는 세상이 사라져 가는 것 같아 그런 부분도 아쉬움이 크다.
나의 어릴 적 독서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이미 충분히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금 오히려 더 생각나는 책이 있다.
'갈매기의 꿈', '어린 왕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같은 책들을 읽을 때 함께 매대에 자리하고 있어 사서 읽었던 추억이 있는 작품이다.
내 기억에는 당시의 교과서보다도 조금 얇고 나비 그림이 그려진 노란색 디자인의 책이었는데,
미국 작가 트리나 포올러스라는 분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읽기에는 딱 적당한 글씨 크기와 삽화가 있는 책이었고, 책의 줄거리도 얼추 기억날 정도의 간단한 플롯을 가진 글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지금 가끔 생각나는 건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글 속에 비유된 현실을
이제 충분히 겪고 느껴본 나이가 됐기 때문인 것 같다.
왜, 무엇을 얻으려 경쟁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상처 주면서 높은 곳을 향하는 애벌레들의 모습과 성인이 되어 겪어본 세상의 모습은 많이 닮아 있었다.
고치가 되어 시간을 견디고 나비가 되는 모습이 현실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말하려는 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듯하다.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의 양식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글들을 통해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독서에 대한 추억여행을 하다 보니 나의 T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다.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는 모습이 책의 중요한 서사인데 왜 책의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을까?
오히려 '벌레에게 희망을'이란 제목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번 연말 휴가 때는 기억난 김에 '꽃들에게 희망을' 책을 찾아 다시 읽어봐야겠다.
어디 한번 희망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