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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Sep 16. 2024

아홉 시는 09시, 21시? 아니면 00시?

항공의 특이한 시간 표기법

타워에서 일할 때 단순히 '아홉 시'라고 시각을 얘기하는 건 곤란하다. 오전 9시인 09시를 뜻할 수도 있고, 오후 9시인 21시를 뜻할 수도 있고, KST라면 UTC로 00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헷갈림을 유발하는 건 조금은 특이한 항공의 시간 표기법 때문이다.


베트남항공 B787이 탑승동에 주기되어 있는 모습



12시간제 vs 24시간제


평범한 직장인의 근무시간이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저녁즈음에는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항공은 24시간 내내 on-air 상태다. 항공에서는 시간을 이야기할 때 당연히 24시간제를 적용하며, 00시 00분 00초부터 23시 59분 59초까지가 시간의 범위다. 24시 00분 00초는 없는 시각이다.



24시간제 표시. 얼마 전 이 중 하나를 탔다.



관제사가 관제교신을 할 때에도 24시간제를 기본으로 한다. 오전a.m.이나 오후p.m.는 교신에서는 쓰지 않는 단어다. 쉴 새 없이 비행기가 오가는 공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24시간제 표시에 굉장히 익숙하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비행기 출발편과 도착편 안내 화면에 표시되는 출도착 시각도 전부 24시간제로 표시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핸드폰이 표시하는 시각은 언제부터인가 24시간제로 고정되어 있다. 직장을 갖기 이전부터 약간 애매한 오전-오후의 12시간제보다는 대충 봐도 확실한 24시간제 표기를 선호하긴 했다. 이따 아홉 시에 약속이 있어.라고 말하면 그게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한 번 더 물어봐야 하는 수고가 따르기도 하니까. 평소에 ‘이따 21시에 약속이 있어.’라고 말하는 건 조금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직업병의 일환으로 가끔 입에서 튀어나온다.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17:38 같은 시간을 보고 친구들이 왜 그렇게 쓰는 거냐며 물어오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도 12시간제 대신에 확실한 24시간제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첫째로 24시간제가 국제 표준(ISO 8601)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혹시 모를 혼동을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 표준시 UTC vs 한국 표준시 KST


하루종일이 on-air인 데다가 비행기는 시간대를 넘나들며 왔다 갔다 한다. 당장 바로 옆인 중국으로만 가도 우리나라와는 1시간 시차가 있다. 수시로 적용 시간대를 바꾸는 것보다는 어떤 한 시간을 항공의 표준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운항 중인 항공기는 항상 국제 표준시(협정세계시)인 UTC를 기준으로 시간을 다룬다. UTC는 경도 0도에 위치한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시각으로 한국 표준시인 KST보다 9시간 느리다. 조종사와 관제사가 관제교신할 때는 반드시 UTC를 기준으로 하는 24시간제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륙하기 전이더라도 항공기가 운항 중인 순간부터는 UTC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나라표준시인 KST는 관제교신을 할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류장관제사가 다루는 항공편 리스트 프로그램은 KST를 기본으로 하며(곧 UTC 사용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업무일지도 KST를 기준으로 작성하게 되어있어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시간이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항공기에게 후방 견인 허가를 줄 수 있는 목표엔진시동시각(TSAT)이 우리 시스템에는 KST로 표기되어, 조종사들에게 해당 시각을 알려줄 때에는 다시 역산해서 UTC로 알려줘야 한다. 나처럼 계산에 약한 인간은 머릿속으로 UTC랑 KST를 변환할 때 2초 정도 딜레이가 생긴다.


항공에서 UTC를 기준으로 하는 바람에 필수적인 항공정보를 전달하는 NOTAM이나 AIP도 반드시 UTC로 날짜와 시간을 표기한다. 한국에서 살기 때문에 출퇴근은 한국시로 생각하고, 관제 업무일지는 KST로 작성하고, 우리 공항도 전체적으로는 KST를 사용하고 있는데 항공정보는 UTC로 전달되는 바람에 매일매일이 시간 계산의 연속이다. 우리 관제업무와 연관되는 비행정보는 따로 기록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KST가 국제표준시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UTC를 표시하는 관제탑의 GPS 시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타워에서 일할 때 단순히 '아홉 시'라고 시각을 얘기하는 건 의도치 않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전 9시인 09시를 뜻할 수도 있고, 오후 9시인 21시를 뜻할 수도 있고, KST라면 UTC로 00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관제사들이 근무하면서 발생한 어떤 내용을 메일로 공유할 때는 그래서 이렇게 날짜까지 덧붙여 표시하곤 한다.


<OOO 발생>
- 편명 : ABC123
- 발생 시각 : 9.15. 09:00(KST)


역시 관제사는 시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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