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의 커피이야기
바흐는 작품 ‘커피 칸타타’에서 “커피의 맛은 천 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 머스캣 포도로 빚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다”라고 말했고, 베토벤은 “60알의 원두에서 60가지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하며 자신이 마실 커피를 챙겨 다녔다. 브람스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장 먼저 오선지와 담뱃갑과 커피 추출기를 챙겼다.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작가와 정치인, 철학자들도 커피에 관한 찬사를 쏟아냈다.
유럽의 수많은 지성들을 황홀감에 빠트렸던 이 검은 음료는 어떻게 그들과 마주했을까,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커피는 유럽이 아닌 저 먼 아라비아 땅 예멘에서 한 목동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본디 이슬람의 음료였지만 다양한 과정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이후 전 유럽을 매혹시키고 신대륙 아메리카에 이어 동아시아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 시켰다.
지금부터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커피의 시작과 이어진 커피의 역사 중 한 갈래이며, 이 검고 쓴 물이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고향 ‘유럽’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일상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살펴보자.
어느 멋진 바로크식 저택의 테라스에 자리 잡은 백작은 지난밤의 화려한 파티를 생각하며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의 앞, 둥근 탁자 위에는 고풍스러운 접시 위에 담긴 과자 조각들과 둥근 잔에 담긴 커피가 있다. 백작의 손가락은 잔의 손잡이를 섬세하게 휘감는다. 이윽고 입안에 한 모금 머금은 씁쓸한 액체의 향을 음미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커피를 즐기는 유럽인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커피는 이런 상상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음료였다.
예멘의 한 목동이 염소들의 과도한 흥분 상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해낸 커피는 무슬림들에게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의 카와(k’hawah)라고 불렸다. 성직자인 이맘들이 새벽 기도 때 피곤을 잊기 위해 보급했다고도 하고,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전달받았다는 신약(神藥)이라는 전설도 전해져오지만 이후 커피는 율법으로 술을 금지하는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의 와인’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이슬람 세계 전반에 널리 음용되었다. 그렇다, 본래 커피는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번듯한 수염을 갖춘 황갈색 사람들의 음료였다.
이런 이슬람 세계의 커피 사랑은 기독교 세계에 만연한 와인 찬양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의 과즙은 예수의 피로 화했으며, 그들의 교리에 고행과 금욕을 주요 덕목으로 하면서도 와인의 음용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 기독교사회에서는 와인이 빵만큼이나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가장 거룩한 희생의 상징으로 취급했다. 기독교는 육신의 고행을 끊임없이 설파해왔으며, 톨스토이에 이르러서는 금주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은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에서 신도에 이르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와인의 거짓 없고 우애어린 지적·영적 효과를 찬양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유대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그 이전의 모든 종교를 압도하는 에너지로서의 역할을 해온 와인을 비난으로 점철했다. 마호메트는 선대의 사람들이 절제와 근엄 외의 무엇도 행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와인을 근절시켰다. 이후, 이슬람이 발을 디디는 곳마다 포도밭은 다른 용도로 변경되었고 번성하던 포도의 경작은 종말을 고했다. 한때 로마에 속해 포도 덩굴이 무성하던 지중해의 남부 해안 일대는 헤지라 이후, 이슬람의 영역이 되면서 포도재배를 포기했다.
마호메트의 도래와 와인에 대한 금기는 지중해 남부 유역, 즉 북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번성했으며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의 지배 이후 번성해 있던 그 지방의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화를 끝장내버렸다. 후에 1868년, 독일의 여행가 게하르트 롤프스는 고대 그리스 식민지였던 리비아 동부 지방을 여행하면서 이 지방의 투르크인들의 주요 수입품 중 와인이 포함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 옆에 자리한 술의 신 바쿠스의 무너진 사원이 위용을 자랑하던 과거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만 그 지방에는 더 이상 와인의 재료가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커피와 와인! 각성과 수면! 이들은 극명하게 대립하는 존재였다. 커피의 궁극적인 효능이 각성하게 하는 것이라면 와인의 궁극적인 효능은 잠들게 만드는 것이다. 와인의 신인 바쿠스가 도취의 신이라는 걸 보여주듯, 와인의 음용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마비시킨다면, 커피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깨우고 논리적 이성에 충실하게 만드는 ‘안티 바쿠스’의 선봉장이었다. 물과 기름마냥 서방과 동방으로 갈라진 이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평화가 아닌, 전장에서 시작되었다.
1683년, 동유럽의 대도시 비엔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장엄한 성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도시를 포위한 채 포탄을 퍼붓고 있는 투르크 병사들뿐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유럽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에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전역을 넘보기 위한 발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자 유럽 본토로의 관문 역할을 하던 비엔나로 20만 명의 대군을 몰고 포위전을 펼쳤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는 린츠로 도망가서 제후와 세습 귀족을 설득하고 폴란드 왕의 협력을 얻어 투르크에 대항할 군대를 결집시키는 중이었다.
비엔나 시장 리벤베르크와 시민군의 우두머리 스타헴베르크는 도시의 시민들이 공황상태로 빠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지만 참호와 광산으로 연신 쏟아지는 포탄과 우물 앞에 쌓여가는 사망자와 부상자, 수시로 불길에 휩싸이는 무기고를 사수하며 가까스로 7월을 견뎠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이 되자 이질이 창궐하여 도시 내의 모든 병원이 환자들로 터질 듯 붐볐다.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변화하는 달처럼 끊임없이 새롭게 이어지는 투르크의 공격에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비엔나 함락은 불가피했다.
비엔나만 함락시키면 다뉴브에서 린츠로 가는 길이 투르크에게 활짝 열리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동유럽 전역이 투르크의 손에 떨어질 것은 시간문제이고, 유럽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터다. 어쩌면 이들의 항전은 수세기 전, 사라센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킴으로서 나아가 전 서유럽을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한 카를 마르텔의 전투에 이은 제 2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였다.
궁지에 몰린 비엔나 시민들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폴란드인 게오르크 콜쉬츠키였다. 오랜 시간 투르크의 통역사로 활동하면서 투르크인들과 섞여 살았던 그에게, 비엔나를 구원할 지원군의 대장 로렌 공작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물론 임무가 성공하려면 도시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투르크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콜쉬츠키는 시종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투르크인으로 위장하고 1683년 8월 13일에 도시를 빠져나가 투르크군의 진영사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콜쉬츠키는 투르크어로 노래를 부르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우연처럼 두 남자는 투르크군 사령관의 막사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고 자비로운 투르크 사령관은 자신의 백성과 같은 모양새의 뼛속까지 흠뻑 젖은 두 남자를 측은하게 여겨 따뜻한 화로 옆에서 온기를 얻을 시간을 베풀고 그들의 행선지를 물었다. 둘은 허기를 채우고자 잘 익은 포도가 무성한 도시 서쪽에 있는 포도밭으로 향하는 중이라 말했다. 사령관은 포도가 금지된 과일임을 상기시키고, 포도 재배자이며 질투심에 가득 찬 크리스찬들이 무슬림의 적들임을 일러주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이어 커다란 그릇에 뜨거운 커피를 따라주며,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마시는 와인보다 알라를 기쁘게 하는 음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진영의 서쪽으로 가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조치해주었다.
물론 사령관이 베푼 자비로움은 그의 제국에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무사히 로렌 공작과 만난 콜쉬츠키의 신호로 동맹군이 도착했음을 알게 된 비엔나 시민들의 사기는 콜렌베르그 정상에 나부끼는 동맹의 깃발만큼이나 드높았다. 마침내 9월 12일, 양측 지휘관들의 진격 명령 아래 투르크 군과 기독교 군이 격돌했다. 다뉴브 강을 둘러싼 너른 평원에서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 땅에서 널리 재배되던 포도밭의 향기로움은 피와 철, 화약 냄새에 파묻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격렬한 전투의 와중 투르크 군의 진영에서 한 줄기 연기와 예언자를 상징하는 녹색 깃발이 펄럭였다. 이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죽음을 뜻했다. 바덴과 프랑크, 폴란드 등지에서 모인 기독교 병사들이 투르크의 진영을 유린하고 있었고, 이들의 분투에 용기를 얻은 비엔나 시민군도 성문을 열고 가세하면서 투르크의 패주는 가속화되었다.
동맹군의 군주 중 한 사람이자 선봉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폴란드의 왕인 얀 소비에스키는 수적으로 우세인 투르크 군의 반격을 우려해서 병사 중 누구라도 대열을 이탈하거나 약탈을 행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려 군의 기강을 단속하는 한 편, 흐트러진 진영을 재구축 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투르크의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막대한 노획품을 얻은 왕은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투르크 총사령관은 얼마나 급했던지 타고 있던 말 한 마리와 입고 있던 옷 한 벌만 가지고 달아났다오. 막사의 면적이 바르샤바와 렘베르크를 합한 것만큼이나 컸다면 상상이 되겠소?” 이런 편지의 내용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동맹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자그마치 25,000 채의 훼손되지 않은 장막과 20만 마리의 소와 낙타와 노새, 양 10만 마리, 그리고 15만 포대에 달하는 곡식을 노획했다.
이런 전리품 중에는 기독교도들에게 아주 생소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빛깔의 알갱이가 가득 담긴 포대도 있었다. 그럴싸한 냄새와 잘 말린 상태의 콩이나 곡물로 생각되는 이 검은 물질은 그들로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물건의 처분을 놓고 고심해야했다. 낙타의 사료라는 주장부터 많은 추측이 난무하던 와중, 때마침 전장을 정리하던 콜쉬츠키가 이 포대들을 보고 흥분해서 이것들을 양도받기를 원했다. 비엔나와 동맹에 훌륭한 봉사를 한 이 폴란드인의 요구에 그들은 이 ‘쓸데없는 사료’를 기꺼이 넘겨줬다.
그는 이 전리품을 이용해 비엔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커피 하우스를 열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침략자가 남기고 간 ‘투르크의 찌꺼기’에 대한 인상은 좀처럼 온화해질 기미가 없었다. 고민에 빠진 콜쉬츠키는 방법을 궁리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손님들이 투르크식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좋아할 만한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를 만들면 돼.' 그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천으로 된 필터를 통해 잔에 그득했던 커피 찌꺼기를 걸러냈다. 커피의 맛은 침전물에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투르크인과 발칸 반도 사람들이 알면 경악할 일이지만, 콜쉬츠키는 새로운 커피에 굉장히 만족했다. 그는 여기에다 잘 숙성된 꿀을 듬뿍 넣고 크림을 가미하여 검은색을 희석하고 맛을 부드럽게 했다. 기존의 투르크식 커피와 전혀 다른 유럽 고유의 커피, 바로 비엔나커피, 아인슈패너(Einspanner)의 탄생이다.
이 새로운 유럽식 커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그의 커피하우스는 곧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나아가, 콜쉬츠키는 이웃의 제빵사 페터 벤들러와 협력하여 초승달 형태의 가벼운 롤빵 ‘크루아상’을 커피에 곁들였다. 이제 비엔나 시민들은 크루아상과 크림이 듬뿍 올라간 달콤한 커피를 마시면서, 바로 얼마 전 폭풍처럼 비엔나를 침공해오던 초승달의 추종자들을 패퇴시킨 것을 자랑스럽게 회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하루 일과가 됐다. 이후 시럽을 가득 채운 동그란 도넛 크라폰이 커피의 옆자리에 자리하며 커피와 크루아상, 도넛은 ‘비엔나 커피하우스’라는 거대한 제국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