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비엔나가 커피 향기로 휩싸이는 동안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커피의 존재를 몰랐을까? 물론 비엔나가 유럽의 커피 전파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다른 국가의 일부 도시, 특히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들을 바탕으로 커피는 꾸준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개중에도 베니스, 마르세유 등 지중해에 접한 유럽 남쪽의 항구도시들은 이런 커피 무역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있었다. 이들은 과거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탐험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후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탐험가와 해상 무역을 업으로 삼는 상인들을 배출해냈으며, 그들은 당시 적국이나 다름없던 투르크의 영역을 드나들며 이 기이하고 독특한 음료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접촉이 빨랐다고 하여, 전파가 빠르진 못했다. 동방 무역품들을 당시에도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었고, 마찬가지로 커피 또한 일반 시민들은 고사하고 돈 많은 상인과 일부 귀족들이나 향유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런 역사의 시간에도 현재 커피는 가장 대중적인 서양 음료로 널리 각광받고 있다. 과연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카페 우 리앵(cafe ou rien, 우리에겐 오직 커피뿐)’을 외치는 프랑스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여섯 번 티타임(teatime)을 갖는 영국, 맥주의 나라 독일까지 이들의 역사 속에서 커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들이 ‘이슬람의 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보자.
프랑스, 커피와 사랑에 빠지다
1643년, 레반트와 무역을 하는 배 한 척이 마르세유에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막 돌아온 상인 드 라 로크는 자신의 짐을 풀며 금속 주전자와 검게 볶은 콩을 지인들에게 소개했고, 10년 후쯤에는 원두 자루를 실은 노새들이 항구에서 잘 지어진 저택들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1660년에는 이집트에서 온 오직 커피만을 실은 화물선이 항구에 들어섰다. 배에서 내려진 화물들은 곧장 약국으로 운송되었다. 이후에 마르세유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기고 이를 흉내 낸 가게가 우후죽순 나타나기 전까지 이 그리스의 후손들에게 사람의 정신을 각성시키는 이 신비한 물질은 일반적인 음료보다는 약물로 취급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커피는 대중적으로 소비되기엔 너무 고가의 식품이었다. 원두를 살 수 있는 곳은 마르세유가 유일했고, 마르세유인들은 원두에 1파운드에 80프랑이라는 가격을 매겼기 때문에, 부자들 중에서도 최고 부자들만이 프로방스에서부터 사람들을 보내 원두를 공수해서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소위 ‘투르크 마니아’로 오리엔탈적인 것에 열렬한 성원을 보내는 귀족들 혹은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커피의 소비를 일반 대중에게로 돌리려고 처음 시도한 이는, 파스칼이라는 미국인이었다. 사업차 투르크와 유럽을 자주 방문하던 이 사내는 프랑스 산업박람회를 방문했다가 동방 문물에 관심이 풍부한 프랑스인들의 모습을 보고 콘스탄티노플의 커피하우스를 그대로 옮겨와 1672년에 생제르맹의 시장에 프랑스 최초의 커피하우스 ‘메종 드 카오바’를 열었다. 저렴한 원두 공급을 위해 동쪽의 레반트에서 직접 수입을 하는 등, 많은 열정을 쏟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수상한 검은 음료를 호기심에 한 두 차례 맛볼 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결국 그는 사업을 접고 런던으로 떠났다.
이어서 파리에서 말리반이라는 또 다른 미국인이 커피하우스 사업에 도전했다. 성장세를 기록하던 그의 커피하우스는 이후 그의 조수였던 페르시아인 그레고르가 가게를 넘겨받으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그레고르는 고향에서 커피가 문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것을 상기하고 유명 극단인 코메디 프랑세즈 근처의 루 마자랭으로 커피하우스를 옮겼다. 그의 예상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수많은 작가와 배우, 관객들이 커피하우스를 이용했고, 거기에 그레고르의 섬세한 응접 솜씨가 곁들여져 극단 관계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쌓아 이 유명한 극단이 가는 곳에 매장을 옮기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1689년 최초의 극장 카페가 프랑스에서 성립되었다. 이후 그의 상술을 모방한 가게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1690년경에는 커피하우스를 차릴 자본이 부족했던 캉디오라는 그리스인이 한 손에 커피 주전자를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커피를 파는, 소위 방문판매를 행했는데,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프랑스 사람들은 이색적인 검은 음료의 향내에 점차 익숙해졌다.
18세기에 들어서며 프랑스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대화와 비판을 좋아하는 성향이 점차 두드러졌고 따라서 그들이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거리로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702년 정말로 근대적인 대규모 카페 ‘카페 프로코프’가 파리에 둥지를 틀었다. 카페 프로코프는 18세기 모든 파리지엔 커피하우스의 원형이었다. 주인인 프랑스인 프로코피오 디 콜텔로는 종래의 투르크풍의 커피하우스 대신 거울과 촛대, 대리석 상판으로 된 탁자로 건물을 꾸미고, 커피에 곁들일 초콜릿이나 브랜디, 얼음, 셔벗, 등의 각종 진미를 제공하며 파리지엔의, 파리지엔을 위한, 파리지엔에 의한 ‘카페’를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카페는 기존과는 다른, 말 그대로 유럽식 커피하우스였다. 그리고 이곳을 진원으로 ‘유럽의 커피’와 ‘카페’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파리지엥의 생활 (David Carry, 1822) 출처: age FOTOSTOCK
런던에 피어난 커피하우스
지금에선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1680년에서 1730년까지 반세기 동안 영국, 특히 수도 런던은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커피를 많이 소비했다. 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그 이후였다. 1650년대에 영국 국민은 병들어있었다. 지배자들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은 민중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거리마다 자리 잡은 선술집들에 의해 사람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알코올 중독이 만연했다. 그들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약을 필요로 했으며, 거리마다 폭력이 즐비했고, 술병과 술잔이 무기로 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절망과 실의 속에서 영국인들은 쇠고기로 근육을 채우고 알코올로 호흡하고 있었다.
초기에 커피는 이들에게 약제로 처방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제자이자 의사였던 월터 럼지는 커피로 ‘술고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의사들의 열렬한 지지와 함께 런던에 데뷔한 커피는 마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절주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리스 사람 파스칼 로세아는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차렸다.
근엄하게 데뷔한 커피는 이내 양조업자와 선술집 주인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들은 맥아와 홉으로 주조되는 전통의 음료가 새까만 커피콩을 달여낸 즙에 쫓겨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런던 시장을 찾아가 이 ‘이방인의 음료’에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로세아는 연간 6펜스 은화 천 개를 세금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맥주 상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커피하우스에서 맥주도 함께 팔 것을 종용했다.
이런 논쟁을 지켜보고 있던 제임스 파는 커피의 성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자신이 운영하는 이발소를 찾는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주류 판매인들이 똘똘 뭉쳐 그를 법정으로 불러냈지만 그는 로세아와 달리 영국인이었고 성실한 납세자였기에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수차례 탄핵과 고발이 이어졌지만 1666년 런던 대화재의 불길에서도 파의 커피하우스는 건재했다.
커피의 대중화는 영국 전체에 절주문화를 확산시켰지만 논란은 그치질 않았다. 기존에 술집에 가해지던 비난이 새로운 형식으로 커피하우스에 가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팸플릿에는 '커피하우스는 산업에 커다란 방해물이 되었다. 과거에 신망 높았던 유능한 신사와 상인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커피하우스를 연다. 이들이 커피하우스 한 켠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보통 서너 시간을 소비하는데, 이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들을 불러내기가 다반사이므로 결국 수많은 남자들이 여섯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나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게 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의 글이 게시되며 커피를 공격했다. 이뿐만 아니라, 커피하우스로 인해 농산물의 유통이 어려워지고 이로 인해 지주들 또한 지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진짜 문제는 정치였다. 영국 전역에 자리 잡게 된 커피하우스에서 문학·철학·과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토론이 쉽게 형성되었는데, 특히 정치가들은 수시로 커피하우스에 모여 회합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본 영국의 시인 포프는 ‘커피는, 정치가들을 현명하게 만들지. 또한 눈을 반쯤 감고도 모든 걸 꿰뚫어 보게 하지.’라는 시를 남겼다. 이런 모습을 본 영국 정부는 통제 불능의 정치 회합을 염려하여 윌리엄 존스 법무장관의 포고문을 통해 1676년에 런던 전역의 커피하우스를 폐쇄했다.
영국 의회는 이런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다. 당대의 커피하우스는 영국 주요 정치세력의 회합 장소뿐만 아니라 정당의 사무실이자 당원 선발을 위한 접대실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폐쇄한다면 당의 운영에 큰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정부는 포고문을 내린 지 며칠 만에 이를 회수했다. 다만 가게 주인들에게 커피하우스 내에서 정치와 관련된 책자의 거래를 금하고, 선동적인 연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 이런 일련의 소동 끝에야 영국 시민들은 여느 오락장소에서든 자유로이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영국에 전역에 들어차 있던 커피하우스들은 수많은 작가, 시인, 배우, 정치인들의 모임 장소로 각광받았지만 당시의 시끌벅적한 커피하우스는 본래 담화를 즐기지 않는 영국인들의 성격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떠들게 만들고, 논쟁을 야기하는 커피는 영국인들이 말하는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이다”라는 섬사람 특유의 가족 고립주의에 어울리는 음료가 아니었고, 영국 사람들의 기호는 점차 중국에서 들여온 차로 옮겨갔다.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도 커피의 확산을 지원해주지 못했다. 영국은 차의 주요 산지인 인도 등을 식민지로 가졌지만 커피의 재배지였던 아라비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한몫을 더했다. 때문에 1730년이 되자 마치 불꽃처럼 영국을 뒤덮은 ‘카페오마니아(caffeo-mania)’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17세기 영국 커피하우스 전경 (출처 : wikimedia)
커피와 독일 여인들
1686년, 비엔나에 등장한 놀라운 음료에 대한 소식은 남부 독일로 흘러들었다. 오래지 않아 비엔나식 커피의 음용법이 다뉴브 지역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 열기에 힘입어 라티스본에 첫 커피하우스가 들어섰으며, 오래지 않아 북쪽 멀리 떨어진 뉘른베르크에도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커피를 즐기기엔 원두 수송이라는 커다란 문제점이 존재했다.
비엔나는 발칸 반도의 다른 국가들,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통해 투르크에서 흘러나온 신선한 원두를 들여올 수 있었지만, 유럽 북쪽에 위치한 독일은 사정이 달랐다. 육로를 통한 교역은 독일인들이 소비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은 해로를 통한 교역뿐이었지만, 당대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가 커피 무역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아주 적은 양만이 유입되었다. 거기다 독일 전체에 퍼져있는 맥주의 신, 갬브리누스의 신봉자들은 검고 쓴 동방의 음료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독일의 커피 대중화는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1841년 함부르크 항에는 무려 36,000톤의 원두가 하역되었다. 그 산더미 같은 원두라니! 맥주의 신자들이 마음이 돌변해 커피의 신도로 개종이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 시의 거리는 갖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식당, 맥주 바, 와인 숍으로 넘쳐났지만 커피하우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당대 독일 문학계를 풍미하던 음료는 커피가 아니라 차였으므로, 누가 그처럼 많은 커피를 소비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커피의 주 소비층은 어떻게 생활했는지 기록조차 거의 남지 않은 중산층의 여성들로 흔히 ‘훌륭한 독일 시민의 아내들’로 불리던 이들이다. 그들은 집안일을 마치고, 남편과 아이들의 수발을 끝내 놓고서, 함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커피에 케이크를 곁들여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바느질을 했다. 커피는 통통한 커피포트에서 커피 잔으로, 그리고 여인들의 위장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즐기던 커피는 프랑스나 영국에서 소비되던 투르크식 커피와도, 비엔나에서 소비되던 유럽식 커피와도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 수다스러운 독일 여인들은 커피의 강렬한 자극을 피하기 위해 다량의 물과 설탕을 첨가했고, 오후 내내 열 잔 내지 열두 잔을 마실 수 있는 유순한 음료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인들의 ‘묽은 커피’는 남성 중심 사회였던 독일에선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이 무렵에 생겨난 두 가지 신조어가 독일에서 오늘날까지 통용되는데, 바로 ‘카페클라치(Kaffeeklatsch)’와 ‘카페슈베스터(Kaffeeschwester)’가 그것이다. 전자는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십이나 스캔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가십이나 스캔들을 좋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처럼 당대 독일에서 커피란 ‘여성의 음료’로 간주되었고, 이런 생각은 당시 그려진 독일 언론사들의 캐리커처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독일의 남성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은 걸까? 비록 광범위하게는 아니지만 독일 남성들도 분명 커피를 마셨다. 1855년의 커피 가격 폭등에 반발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에서 정치, 문화의 중심지는 극장 혹은 맥주 바였다. 시민들은 커피하우스도 없는 베를린 어디에서 이 검은 음료를 탐닉한 걸까? 정답은 제과점에 있었다.
‘콘디토라이(Konditorei)’, 즉 제과점은 베를린 여성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독일 여성들은 남성과 같이 폭넓은 사회 활동을 보장받지 못했지만, 제과점만은 남성들과 다름없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덕택에 베를린에는 프랑스나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만큼이나 제과점이 많았다. 베를린 사람들의 결혼에는 늘 제과점에서의 데이트 과정이 뒤따랐는데, 제과점이야말로 좋은 가문의 청춘남녀들이 신분의 체면을 잃지 않고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제과점에서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아주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가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제과점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여성의 음료’가 영역을 확장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잇따른 전쟁 이후,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서면서, 독일 시민들의 부(富)가 급격히 증가했다. 부유해진 베를린 시민들은 1870년 이전까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시골이나 해변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이런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커피를 공급하며 드디어 독일에도 프랑스나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 비견될 ‘카페’ 들이 생겨났다.
독일인의 국민 음료인 맥주는 함께 여행하기에 좋은 길동무는 아니었다. 맥주를 가지고 가려면 커다란 마차를 빌려야 했기 때문에 휴가비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맥주의 공백을 메꿔준 것이 바로 커피였다. 베를린 근교의 카페 쉬베스테른을 시작으로 독일의 도시 근교의 숲과 개울 옆에 커피 가든이 들어섰다. 이들은 “가족 여러분, 여기서 커피를 만들어 드세요!”라는 푯말을 내걸고 여행 온 독일인들의 저녁 식탁에 자연스럽게 커피가 스며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