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미싱영 우먼 (Promising Yong Woman)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에메럴드 펜넬 작, 2020)
https://www.imdb.com/title/tt9620292/?ref_=nv_sr_srsg_0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강간당할 만한 여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의식이다. 물론, 동의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시종일관 이 문구를 매 씬마다 관객들에게 되새겨준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강간당한 것을 ‘여자 탓’이라고 여기며, ‘당할 만하다’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옷을 야하게 입어서’부터 ‘술을 많이 마시며 정숙치 못한 행동을 해서’, 혹은 ‘여관방에 같이 가서’ 등 이유는 수없이 다양하다. 분명 피해자이지만, 피해자스럽지 못한 행동, 피해자다운 자질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등 피해자라는 그물의 공간에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카산드라’(캐리 멀리건 역)는 첫 장면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품기며 등장한다. 술집에서 그야말로 ‘떡’이 된 채, 일행도 없이 ‘혼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있다. 그녀를 본 어느 남성 일행들은 먹기 쉬운 먹잇감이라도 된 냥 흥분하며 누가 먼저 그녀를 낚아챌지 농담한다. 그러나 사실 그건 카산드라가 쳐놓은 ‘역 그물’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그물에 걸린 남자들을 밤마다 찾고, 그들의 비열한 행동에 일침을 놓고 다녔다. 아쉽게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딱 거기까지 이다.
그녀가 친구랑 찍은 사진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아 이건 복수극이에요.’라는 너무 진부한 멘트를 던지는 것 같았다. 카산드라는 십 대 여자애들처럼 다이어리에 한 명씩 남자들의 이름을 쓰고, 그 이름을 지우며 살았다. 그녀가 아무리 그녀의 ‘역 그물’에 걸린 남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에 대해 일침을 놓아도, 그들은 그녀를 그저 ‘미친 여자’ 정도로 취급할 뿐이었다.
그렇다. 그런다고 세상이 쉽게 달라지진 않는 법이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판타지’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의'에 근거하여, '응징'하는 게 최종 목적이 되는 셈이다.
세상에 대해 온갖 시니컬한 태도를 보였던 카산드라는 ‘라이언’ (보 번햄 역)을 만나면서 나긋나긋하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된다. ‘모든 걸 묻고 살자’ 생각했던 그녀는 우연히 듣게 된 예전 클래스메이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언가 떠올랐고, 그렇게 챕터별로 복수를 진행한다. 유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킬 빌(퀸틴 타란티노, 2003)’ 같은 드라마틱한 복수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스릴 넘치는 복수극을 생각했다면 애당초 접어두자. 그러나 희한한 점은 감독 에머럴드 펜널은 이 영화를 그럴 스릴 넘치는 복수극의 장대한 서사처럼 생각한 듯싶다. 설정된 챕터들은 각각 인물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인지, 이 영화를 괜스레 멋스럽게 보여라고 한 장치인지 잘 구분이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천천히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 당신의 등에 칼을 꽂았던 사람이다(대부, 프란시스 코풀라, 1972) 같은 철칙과 동일 범주에 있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 결국 범인이 되는 것’이라는 클리셰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는 지루해지며, 패리스 힐튼의 노래를 계속 듣는 것은 참으로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힐튼의 노래 가사 역시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전달하는데, 이 역시도 너무나 진부해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화면을 채우는 총천연 색상들은 미안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 영화의 스타일과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주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앞길이 창창한 청년’(Promising young man)의 길을 막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이하고도 낡은 관습에 일침을 놓는 영화이며, 그 여자가 당신의 가족이었을 때도 똑같이 반응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영화이다.
이런 멋지고 훌륭한 주제를 그렇게 ‘뻔하고’, ‘너무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듯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 맬리건은 자신의 매력을 영화 속에서 충분히 어필하였다. 에메럴드 펜널이 여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여배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연출한 듯싶다. 그냥 캐리 멜리건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장대한 복수극의 '킬 빌'은 '의식 없는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라는 장엄한 메시지를 서늘하게 남겨주었던 반면, 이 영화는 너무 메시지를 계속 남겨주려고 해서, 오히려 메시지가 희석되는 역효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