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통 May 23. 2021

2021년 50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관객상)

쿠오 바디스. 아이다 (Quo vadis, Aida?)

쿠오바디스아이다?Quo vadis, Aida?(야스밀라 즈바니치 작, 2020) 

https://www.imdb.com/title/tt8633462/?ref_=fn_al_tt_1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자행된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의 실제 사건이 배경이 된 영화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B%A0%88%EB%B8%8C%EB%A0%88%EB%8B%88%EC%B0%A8_%EC%A7%91%EB%8B%A8%ED%95%99%EC%82%B4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가장 큰 규모의 학살 사건이자, 현대사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보스니아, 세르비아, 사라예보, 코스보, 발칸반도 등은 익숙한 고유명사들이지만, 그것들의 면면에 대해 세세히 살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건 당시에도 UN, NATO, EU 등 국제기구들은 발칸반도에서 자행된 이 끔찍한 전쟁에 대해 외면 아닌 외면을 했었다.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UN은 말뿐인 위협만 할 뿐이고, 말뿐인 ‘안전’을 ‘보장’했을 뿐이었다. 무력한 UN 사령관은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스레브레니차 주민들 앞에서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이 잔혹한 전쟁에 한가운데 서 있는 UN 통역관인 아이다가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아이다의 개인 가족 이야기이지만, 거기엔 스레브레니차 마을의 이야기이고, 보스니아 전쟁의 이야기이다. 

아이다가 통역하면서 느낀 무력함은 스레브레니차 마을 주민으로서의 무력함이고 세르비아인들에게 공격당한 보스니아인들의 무력함인 것이다. ‘통역’이라는 직업은 마치, 이 실제 사건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통역’과 같은 역할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녀가 가족을 살리려 하는 몸부림들은 발칸 반도에서 살려고 하는 모든 이들의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낯선 이들이 아니다. 한 마을에서 같이 지냈던 이들이고, 같은 기억을 공유했던 사이들이다. 그러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어디가 낯익은 상황이다. 겪은 적 없지만, 한국 전쟁도 그랬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이다 역을 맡은 야스나 두리치치는 스크린을 압도하는 존재감과 강렬한 연기로 이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통역관의 역할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자칫 다큐멘터리처럼 흐를 수 있는 이 역사의 단면을 아이다의 가족을 통해 이입시키면서 극적인 긴박함을 선사해준다. 과연 가족들을 살릴 수 있을지, 아이다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지 매 순간마다 긴장하며 보게 된다. 


결국, 이런 순간들을 통해 주인공인 아이다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그녀의 슬픔, 절망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녀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이들은 ‘침범’ 자이지만, 그들의 또 다른 ‘이웃’인 셈이다.  

 전쟁 전 있었던 파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한 명 씩 클로즈업되는데, 그들의 표정이 무표정하다. 파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 같지가 않다. 그들의 삶은 다가오는 전쟁의 전운 속에 이미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공연’을 감상할 거라며 사람들을 극장에 모두 가둔 후, 자행되는 무 차비한 총살 씬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학살 장면이 끝나고, 화면이 자연스럽게 ‘디졸브’ 되면서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이다는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그녀의 가족들을 유해로 마주하게 된다. 그녀의 감정은 폭발하고, 다시 살던 예전의 집으로 돌아오지만, 모든 게 예전 같지는 않다. 가족이 무참히 학살된 기억은 그녀를 영영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지속된다. 그녀는 그토록 고대했던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도 유해 발굴은 지속되고 있으며, 오늘도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지구 상엔 아직도 존재한다. 


단지 나와 ‘다르다’라는 이유만으로.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정당방위’라는 이유로 공격을 합리화시키고 (‘조 바이든’의 이스라엘 공격 지지 선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416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어떤 이들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며, 어떤 이들은 복잡한 이야기라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많은 ‘아이다’들의 격노와 처절함을 외면할 순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연대’와 ‘공감’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외면받지 말아야 하며, 기억해야 할 진실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어디로 가고 있나요, 아이다?’라는 영화의 질문은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아이다이고,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가 아이다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영화는 유럽의 각국에서 함께 제작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프랑스 , 노르웨이, 터키)

매거진의 이전글 2021년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