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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통 Jul 03. 2021

2021미국 아카데미각색상 노미네이트

화이트 타이거

화이트 타이거 (The White Tiger, 라민 바흐라니, 2021)

https://www.imdb.com/title/tt6571548/?ref_=nv_sr_srsg_3


‘아라빈드 아디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작품. ‘인도의 계층 문제를 정면에서 반박하여 푼다.’기 보다는 위트와 드라마를 적절히 섞어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소설에서 제시된 많은 사회 문제들은 적적히 잘 희석되어 있다. 아무래도 극의 초점이 이야기의 흐름에 있다 보니 통렬한 비판이라든가 재치 넘치는 위트 들은 상당 부분 생략,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전반적인 극의 흐름은 그러한 분위기를 잘 따라가려고 하고 있다. 이는 ‘발라람’을 연기한 ‘아르다시 구라브’의 다양한 연기톤이 한몫하는 것 같다. 그는 순진한 천민의 삶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생리를 깨닫고 자본주의의 시장에서 군림하는 모습까지 다양한 연기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처한 좌절과 분노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으며, 그의 마지막 결단엔 응원의 마음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신분 제도의 한계는 인간 대 인간의 공감능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물론, 그는 신분제도의 불합리를 처음부터 인식하진 못했다. 자신의 정해진 숙명에 어렴풋이 수긍하였지만, 과연 그러한 ‘숙명’을 자신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시작했을 뿐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개인적 호감이나 친분, 공감대는 전체적인 사회의 틀을 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이며, 그런 개인적인 관계 역시 신분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다는 좌절감으로 바뀌게 된다. 

어차피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진보와 민주주의,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뒤에서는 남모래 부자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고 있으며,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하라는 주인, ‘야속’(라지쿠마르 야다브 분)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발라람’을 내쳐버린다. 그것도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평등과 자유를 무장한 교육을 받아왔다고 늘 자부하였지만, 사실 그 역시 필요할 땐 신분제도를 영악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무기 아닌 무기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발라람의 순진하고 티 없는 미소가 무서운 야수의 얼굴로 돌변해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속을 챙기는 게, 더 나은 지배계층이 되고자 하는 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것이며, 통쾌한 복수의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복수의 서사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들이 존재하고, 결정적인 순간들이 스토리 전개상 필요하기 마련이긴 하지만, 발라람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는 약간 의아스러움이 들긴 했다. 살인에 대한 미화보다도 그가 그렇게 아솝에 대해 분노를 하고 있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는 신분의 한계를 받아들인 상태이며, 자기 자신을 미천한 존재로 여기고 있던 터였고, 아솝의 친절한 말 한마디 말 한마디를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몸에 밴, 사회 문화적으로 터득한 신분제에 군림하는 태도를 보이고, 발라람을 업신여긴다 해도 그는 이미 사회의 그런 모습들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가 아솝의 가족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은 극 진행 내내 비춰지긴 했지만, 그런다고 그의 좌절감이 살인으로 까지 이어진다는 건 그의 내면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된 채 건너뛰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1. 신분제도가 또 다른 신분제도를 부른다. 

전통적인 카스트 신분제와 다르게 현 세계에는 또 다른 신분 체제가 존재하고 있다. 그건 바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만들어 낸 ‘부’의 신분이다. 발라람은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의 타고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세탁하진 못했지만 ‘부’의 시스템에서는 그의 타고난 지략, 훔쳐서 얻은 자본, 관찰과 경험 등을 바탕으로 올곧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그를 미천한 종자로 만든 ‘가난’은 그가 살아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셈이고, 그 ‘가난’을 벗어나고자 한 그의 꿈틀거렸던 본능은 그에게 큰 ‘부’를 선사하게 해 준 원천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안정적인 운전사의 신분을 벗어나는 순간,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그는 세상에 던져졌지만, 안에 잠들어있던 야수의 본능이 깨어나듯이, 세상에 맹렬히 돌진하여 ‘성공한 비즈니스 맨’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그런 타이틀은 노동력 생산을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 천하디 천한 타고난 신분에 대한 극복이자, 자본주의의 생리를 잘 간파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얻지 못한 것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일 것이다. 선천적으로 부여된 그의 이름은 그의 본질적인 태생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를 억누르는 굴레일 뿐이다. 그래서 발라람은 자신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고자 한다. 그것도 그가 뺏어버린 누군가의 이름. 그 누군가는 그의 꿈을 빼앗았던 그 누군가. 


2. 위선으로 점철된 평등과 자유의 이름 

아솝과 핑키(프리양카 초프라 분)는 미국에서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들은 인도의 전통적인 문화들이 이해가 안 되며, 그것은 자신들이 추구해온 삶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발라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말하며, 다른 지배 계층들과 다른 면모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는 철저하게 발라람을 하인으로서 이용하고 그를 철저히 하층민으로 대할 뿐이다. 그들이 말한 자유로움과 평등은 그저 그들의 신분 안에서 보장되는 ‘유희’ 같은 위선의 대변일 뿐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정치인들의 행각과도 비슷한데,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상당 부분 부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들 역시 현란한 언어들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자신의 잇속들만 챙기는 또 다른 부류의 ‘위선자’들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는 인도의 사회 불평등 문제를 하층민들의 삶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호텔 지하 어두컴컴한 바닥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현실들,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가도 그에 대해 슬퍼할 겨를도 없는 팍팍한 삶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병원 진료보다는 일터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선들. 인간을 그저 노동력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탐욕스러움. 갠지스 강 앞에서의 고단한 삶 등. 그간 ‘발리우드’에 비친 노래하는 인도인들의 밝은 면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들이 많이 포착된다. 


한 때, 인도의 COVID-19 환자들의 수는 역대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또한, 그들의 절망적인 뉴스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코로나 백신’ 특허권에 대한 유예 결정을 WTO에 통보하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물론, 그런다고 백신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도 및 제3 국가의 백신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깨닫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 

https://www.sedaily.com/NewsView/22L9CQEN17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2003050



인도의 갠지스 강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흐를 테지만, 그 속에 묻어 나오는 울음소리들은 더욱더 거세져 가고 있다. 불평등의 문제는 비단 인도의 문제일 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더욱더 많은 ‘화이트 타이거’들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화이트 타이거’들이 장려되는 것일까? 맹수 같은 투자본능, 남을 억눌러야 올라가는 자신이 지위, 이 모든 것들이 어찌 보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러나 누굴 탓하랴. 그들 역시 ‘자본’에 충실한 영리한 맹수 들일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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