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토이스토리!>
나는 아빠입니다. 지금은 늙은 아빠입니다. 엄마 노릇을 해보지 못한 것이 언제나 서운합니다. 그리고 엄마들을 부러워합니다. 특히 젖먹이 아기를 가진 젊고 예쁜 엄마들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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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커가고 있습니다. 자라고 있습니다.내가 우리 딸에게 사다 준 인형이 있습니다. 돌을 바라다보는 아기만한 인형입니다. 눈이 파랗고 머리는 금빛입니다. 소위 '블론드'입니다. 얼굴은 등근 편, 눈이 그다지 크지 않아 약간 동양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웃는 낯입니다. 인형은 누이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자다가도 금방 눈을 뜹니다. 배를 누르면 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게 해서 울리는 때는 별로 없었습니다.나는 이 인형을 사느라고 여러 백화점을 여러 날 돌아다녔습니다. 인형은 처음에는 백화점에 같이 나란히 앉아 있는 친구들을 떠나 낯선 나하고 가는 것이 좀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상자에 들어 있는 저를 들고 오지 않고 안고 왔기 때문에 좀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귀국할 때도 짐 속에 넣어 부치지 않고 안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떠나오기 전에 난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살 테니까 한국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는 개들에게 서양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 집 개들은 갑돌이와 갑순이입니다. 동생이 없는 우리 서영이가 난영이를 처음 안을 때의 광경을 영리한 엄마들은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세월이 흘렀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아기는 큽니다. 자랍니다. 서영이는 초등학교를, 중·고등학교를, 그리고 대학을, 그리고 시집갈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난영이를 두고 떠났습니다. 그것도 난영이 고향인 바로 뉴욕입니다. 난영이는 언니 따라 자기 고향에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냉정한 이별을 할 수 있나 봅니다. 난영이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른스러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아기입니다. 서영이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잡을 수 없는 나는 난영이를 보살펴 주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낯을 씻겨 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목욕을 시키고 머리에 빗질도 하여 줍니다. 여름이면 엷은 옷, 겨울이면 털옷을 갈아입혀 줍니다. 데리고 놀지는 아니하지만 음악은 들려줍니다. 여름이면 일찍 재웁니다. 어쩌다 내가 늦게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난영이를 재우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난영이는 앉은 채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참 미안합니다. 내 곁에서 자는 것을 가끔 들여다봅니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난영이 얼굴에는 아무 불안이 없습니다. 자는 것을 바라보면 내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젊은 엄마들이 부러운 나는 난영이 엄마 노릇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출처 : 서영이와 난영이 / 피천득 <인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