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의 개인적 경험담
5년을 넘게 활동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활동을 하면서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정말 좋은 회사들과 많은 작업을 하며 경력을 쌓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었고 기분 좋은 결과물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그러는 동안 이상하게 내 마음속 불편한 불안감이 계속 커져갔다. 나 자신이 ‘실력이 없는데 운 좋아서 일하는 작가라고 보이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림에 자신감이 많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외 작업들이 릴리스될 때마다 이상하게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열심히 이를 보여줘야 할 때도 나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내가 이 직업을 1,2년 하다 마는 게 아니라 10년, 20년 넘게 오래오래 하고 싶은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감정이 아닌 즐거운 감정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었고, 그러려면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정말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을 나의 방식으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의 특성상 클라이언트의 요구 조건에 맞춰 나를 보여줘야 되는데 나는 내가 보여주는 비주얼 스타일이 명확하지 않아 많이 흔들리며 작업을 했었다. 나는 누구라도 내 그림을 보고 ‘아 이건 이 작가가 그렸어!’라고 보이길 원했다. 그렇게 내 아트 스타일을 찾는 연구를 시작했다.
집안 책장에 꽂혀있던 내 그림 노트북들을 다 꺼냈다. 대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내가 무엇을 그리길 좋아했고 두들링하듯 어떤 방식으로 편하게 그렸는지에 대한 공통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사람을 그리기 좋아했고, 의미 없는 패턴의 문양들, 꽃과 나무, 그리고 직선이나 꼴라쥬처럼 동떨어지는 주제의 요소들이 어느 포인트에 존재했다는 거. 이런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오케이. 일단은 작은 노트북 여러 권을 새로 샀다. 그리고 그 안에 좋아하는 사람 얼굴을 계속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부터 패션 화보 속 인물들을 보기 좋아했고 그것만 그렸다. 좋아, 그럼 그거를 그리되 어떤 방식으로 편하게 그리는지 보고 그러면서 어떤 아트 스타일이 나오는지 보았다. 어떤 미술 재료를 가지고 그리길 좋아하는지도 봤다. 그리다 보니 점차 잡혀가는 스타일이 보였다. 검은색 펜 또는 마커로 명확한 라인이 보이는 게 좋고, 끄적끄적 되는 느낌이 있는 것도 ‘에라 모르겠어’하는 나의 성향이 보이는 거 같아 좋았고, 한 줄의 선을 긋더라도 이유가 있어 보이는 걸 원했다. 중간중간 이상한 요소들을 무계획적으로 넣는 것도 좋았다.
노트북에 끄적여 그려본 스타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번엔 큰 종이의 그림으로 고차화시켜봤다. 좀 더 다양한 인물의 포즈를 그려봤고 작은 면적에선 표현할 수 없었던 디테일을 보여주려 했고, 패턴이나 다른 요소들을 넣어 다이내믹함을 더해주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스캔해서 포토샵에서 컬러링을 했는데 인물 표현을 단순하게 하니 드로잉이 잘 살아나는 거 같아 좋았다. 좋아! 불이 붙어서 여러 작업을 쏟아내면서 내 그림 스타일을 찾아갔다. 내가 좋아하는 강한 여성상에 내가 잘하는 패턴을 집어넣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활용하게 복잡하게 구성도 해보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드디어 다 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다 2~3달 만에 그림을 멈췄다.
어느 순간, 그림이 재미가 없어졌다.
‘뭐가 문제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아트 스타일도 찾았고 너무 단순한 것만 그렸는데 좀 더 복잡하고 화려하게도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 된듯했다. 근데 희한하게 머릿속에 이 질문이 생겼다.
‘네가 그리고 싶은 게 이거야?
‘음.. 음…. 일단은 이게 뭔가 잘하고 좋아하는 거의 집합체인 거 같기는 한데…’
‘근데 왜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거지’
브랜딩이 잘 되어있는 브랜드(*물건은 기본이고 사람이나 어떤 조직이나 모든 명확한 캐릭터를 가진 것이라 하자)를 관찰하면, 간결화 작업을 통해 명확히 보여주는 키포인트 되는 비주얼적 메인 요소가 있고 거기에 몇 가지의 베리에이션을 주는 요소를 택함으로써 다양성을 살짝씩 곁들여준다. 이건 비주얼뿐 아니라 인기 많은 컨텐츠도 같은 맥락에서 구성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두의 슈스인 우리의 ‘펭수’를 보자. 기본적인 골자에서 당돌하면서 자기주장 강한 펭수의 캐릭터가 메인이 되는 키 요소라면,1)안하무인일 줄 알았는데 사람 감동시킬 줄 아는 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반전의 스토리가 전개된다던가, 2)말재간이며 넘치는 끼로 춤이며 요들 송이며 못하는 게 없어서 다양한 재미적 상황의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 거기에 플러스 3)넘쳐나는 유튜브 속 의미 없는 영상 중에서 재밌으면서도 좋은 메시지 전달로 교육의 참 기능을 해내는 EBS의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기획력 등이 베리에이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오면, 키포인트는 심플하되 연결성 있는 살짝의 베리에이션으로 재미를 주는 게 가장 효과적인 브랜딩의 핵심이라 보이고, 이건 물건을 파는 회사뿐만 아니라 컨텐츠를 파는 크리에이터에게도 해당된다. 나는 아티스트도 같은 맥락으로 정리하면 효과적으로 퍼스널 브랜딩이 구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내가 그리고 싶은 꾸준한 작품의 주제를 통일된 아트 스타일을 보여주되 작품마다 살짝 주제 선택이나 비주얼 요소로 베리에이션을 주자라고 ‘머릿속으로’ 정의를 했다.
‘머릿속에서’ 정의를 한 결과 정리가 다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 틀에 내 그림을 맞추자 급 흥미를 잃어버렸다. 흥미를 잃은 거를 넘어 황망함과 우울감이 밀려왔다.
‘내가 열심히 찾아서 내린 결론이 이건데 내가 재미를 잃었다고?
내가 원했던 건 뭐지’
또 타임아웃 시간이 필요했다.
그림에 대한 생각에 정리가 안되고 또다시 혼돈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동시에 나는 여러 가지의 개인적인 상황에 직면하던 때였다. 너무 개인적인 일이고 또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일들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 나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뭔가 명확한 설명이 안되고 마음속 정리가 안되는 여러 가지 상황 안에 있으니 마치 토네이도 안에 혼자 고립되어 있는 느낌처럼 답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질문을 하도 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기간을 지나 지금의 상황에 오니 내가 찾은 답은 이거였다. 미래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준비를 하며 그에 대한 염려를 계속하니 염려가 걱정으로, 걱정이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바뀌어갔다.나는 지금 현재 내가 밟고 있는 이 길 위에 내 발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지평선에 걸쳐있는 이 길의 끝이 어떨지 발꿈치를 들고 보면서 앞날을 예측하려 한 거 같았다. 그러면서 그 길 뒤에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는 희망보다는 낭떠러지가 아니길 바라는 걱정이 더 커졌다. 그리면서 내린 결론은 행복이란 감정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 같다.
나는 내가 더 좋은 아티스트가 되려면 필요한 조건들을 분석해서 찾았고 그것을 미래의 내가 가고자 하는 커리어의 방향에 맞춰 정리해서 모든 세팅을 맞췄다. 그러나 그 과정 중 현재의 내가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기분 좋은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재미도 없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내가 찾고자 한 답은 이게 아닌데.
한 달 정도되는 힘든 시간을 지나니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자주 쓰는 스케치북에 같은 방식으로 인물을 그렸는데 흥미를 잃어서인지 뭔가 그러고 싶지를 않았다.
그때 문득 유튜브로 한 아티스트가 그림 그리는 영상을 봤는데 그녀는 아이패드 프로 크리에이트 앱으로 사실보다 더 이쁜 인물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했다. 우와~ 하고 넋 넣고 보고 있었는데 문득 '태블릿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태블릿은 화면 모니터가 없고 태블릿 기능만 되는 모델이었는데 굉장히 오래돼서 거의 목숨을 다하고 있었다. 태블릿이 없어도 심화된 작업은 어차피 손 드로잉에서 하니까 마우스로 해도 결과물이 많이 다르지가 않아서 딱히 새로운 모델을 구입을 안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유명한 비즈니스 여성이 이렇게 한 말이 떠올랐다.
‘가끔 당신이 노!라고 생각한 걸 따르면 오히려 진짜 답이 나올 수 있다.
그 노!라는 말 안에는 그게 답인지 알지만 불안감 때문에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같이 있기 때문이다.’
오케이. 모니터 달린 태블릿 한 번 사보지 뭐. 비싸긴 해도 오히려 새로운 걸 그려낼 수 있을 거 같아.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태블릿 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해있더라. 태블릿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다양하고 사실적일 줄 몰랐다. 그전에는 컴퓨터로 만든 인공적인 느낌이 남아있었는데 포토샵 브레쉬도 다양하게 개발됐고, 활용법에 대한 공부를 하니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여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종이에 그리고서 스캔할 때 어쩔 수 없이 묻혀 표현이 다 안되던 디테일도 다 살려 표현할 수 있게 되어 그림이 더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인물도 보통 그리던 여성상 대신 다양한 성별과 인종의 인물들도 그려보고, 하루 종일 인물의 옷에 있는 디테일을 표현하면서 잡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컬러도 넣어보고 평면적이었던 인물 얼굴에 손 가는 대로 디테일도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면서 배경에 두들링하듯 패턴도 그려 넣었고 한쪽 구석에는 별 모양이나 의미 없는 문양들도 넣어보았다.
그렇게 하나씩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시도하니 재밌었다. 그러면서 자유로워진 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했고, 끝이 왔다.
1년 반 동안의 여정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끝났다. 그전에 이미 무수한 생각들을 했었기에 마치 그것들이 믹서기에 갈려서 하나의 내용물로 흔적 없이 섞여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껴지는 거였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느꼈던 정리 안된 혼돈이 나를 너무 괴롭혔는데 이렇게 결론이 나니까 황당스럽게도 언제 그런 고민들을 했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참나. 이 퍼스널 스타일 찾기 작업을 이 1년 반의 집중적인 기간을 넘어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을 했었기에, 그 오래된 방황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다.
물론 테크닉적으로 내 스킬이 많이 좋아져서 지금의 스타일을 찾은 것도 있겠지만, 그 모든 시도와 과정 중에 내 마음속으로 ‘내가 뭘 좋아하지? 이게 나랑 어울리나?’에 대한 질문을 정말 끊임없이 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고 나랑 어울리는 게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과 정의 또한 끊임없이 물어봤다. 심지어 옷을 하나 살 때도 ‘이 스타일이 나랑 어울리나? 나랑 어울리는 스타일이 뭔가?’하며 귀찮을 정도로 질문했다. 뭔지 잘 모르던 20대를 넘어 30대 중반이 돼서도 나에 대한 정의를 찾는다는 게 쉽진않았고, 지금도 잘은 모르겠지만 찾으려고 노력한 만큼 그림이 정리된 듯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의 일러스트레이터 생활을 하면서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부담감 때문에 잘 즐기지 못했었는데, 현재 내가 그림을 오롯이 그리는 이 순간이 주는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미래에 내가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지에 대한 걱정과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많은 인스타 라이크를 얻을까에 대한 생각 등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부수적으로얻을 것에 대한 생각은 버려두고,그냥 오롯이 이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로움 또는 일종의 쾌락 같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얼마나 중요한지 이제야 알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이 모든 과정 속의 혼돈 또는 방황들도 돌이켜보면 감사한 것이었고, 내 선입견을 깨려고 시도하면서 얻었던 예상치 못한 결과들도 고마울 따름이다. 어쨌든 난 내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던 생각들을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냈으니까. 이제야 홀가분하다.
‘It’s already in you. (이미 네 안에 가지고있어.)’
참 간단한 문장인데 이 말을 되새기며 계속 작업을 이어갔었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
단지 그것이 발현되기에 정말 많은 가슴속 두드림과 맞는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더불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금이 돼보니 명확하게 좋은 게 한 가지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신경이 확실히 덜 쓰인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릴 때, 예전에는 사소한 디테일 하나까지 사람들이 좋아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정했다면, 지금은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 손이 가는 대로 그리고 결정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뭐가 맞는다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이건 그냥 내가 원하는 걸 표현하는 거고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 생각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는 그림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인 삶까지 연결이 됐다. 예전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원하는지에 대해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의견에 굉장히 많이 휩쓸려 다니기도 했다. 상황에 휩쓸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싫었는데 그렇다고 어떠한 결정 또한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맘 상하고 답답하고. 지금은 그래도 그에 대한 답을 조금씩 정의해나가면서 결정을 하나씩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지 참.
중요한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충실히 보내는 것.
그래야 행복해지더라.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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