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번째 밑줄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한 사례가 많으면, 새로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덕에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문제를 보아도 과거의 사례들 가운데 얼추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자의 미덕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일의 목표가 과거에 본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재생하거나 복제하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바탕에 깔린 전제가 흔들리는 시대라면, 재생도 복제도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으며,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는 “내가 했던(혹은 내가 보았던) 00 같은 거구나”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참고해보면 좋을 사례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그런 식으로 분류되거나 요약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과거의 00와는 같을 수 없는 지점들, 얼핏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지점들에서 변화가, 가끔씩 혁신이 일어난다. 너무 많은 사례를 아는 탓에 오히려 이런 지점들을 놓치게 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새로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과거에는 명확했던 기준으로 더 이상 분류할 수 없는 사람과 사례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애매함을 표용해주는 영역이 필요하다. 과거의 기준으로 보아 단일하고 깔끔한 목표는 의미 있는 차이,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억누를 가능성이 크다.
짧지 않은 답변을 듣고, 모호한 차이를 모호한 채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일 하세요?”라고 아예 묻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나부터 고쳐 묻는 연습을 해야겠다. 요새 제일 관심 있는 문제가 뭐예요? 요즘 무슨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나요?
- 제현주의 책 <일하는 마음(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어크로스)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