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중인 30대 백수의 변명
인스타그램에서 ‘자발적 고립’이 자학의 한 증상일 수 있다는 게시물을 보았다. 퇴사 이후 눈에 띄게 만나는 사람이 줄어든 나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남편의 귀가만 기다리는 날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요새 내가 사람 만나는 걸 피하고 있는 걸까?”
나는 나의 모든 인간다운 소통을 전담하고 있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웅얼웅얼 말했다.
“아니, 시국이 시국이라지만 만나는 사람 폭이 너무 좁아진 것 같아서...”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여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거야. 그게 적당량이었던 거야.”
그의 말은 묘하게 위로가 되었지만 나는 이내 억울해졌다. 나는 약속 있으면 집에 가고 싶은 집순이지만 막상 약속이 없으면 되게 나가고 싶어 하는 집순이여서, 사람들과 곧잘 교류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럴 생각은 아니지만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정리하자면 그냥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차단했다. 대부분 전 직장 동료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퇴사자에게만 솔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차고 넘쳐서 나는 상당한 시간 동안 꽤나 공들여 같이 욕하고 분노했다. ‘그 사람은 이래서 문제고,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야.’ 그게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운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누가 퇴사한 나에 대해 물으면 대신 잘 말해줬으면 하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한동안 그런 식으로 지난 직장에 대한 회한을 달랬다. 하지만 이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조직과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일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나.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려면 나와 그들을 분리해내야 했다.
친구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평일 낮에 나랑 놀아줄 친구가 없었을 뿐이었다. 평일 저녁에 그들의 직장 근처로 찾아가 백수로서 밥을 얻어먹고 대신 커피를 사는 일이 그리 내키지 않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며 가까운 친구조차 하는 일, 사는 지역, 결혼 유무, 아이 유무에 따라 사는 모양새가 크게 달라지고, 나는 내 걱정이 한가득이어서 사실 만나도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평소에 자주 듣는 말처럼 ‘(좋은 의미로) 네 걱정은 1도 안 되고 내가 더 걱정이야’ 상태였으므로 굳이 내 걱정을 옮기지도, 네 걱정을 흘려듣고 싶지도 않아서 무소식이 희소식인 양 숨어 지냈다.
어렸을 때는 잦은 연락이 친한 정도를 방증한다고 생각했다. 쟤랑 다르게 나는 얘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더 친하다고 으쓱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형태와 속도로 시간을 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락이 좀 없어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중심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을 뿐, 일부러 비싸게 굴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나도 내 입장에서 나보다 더 깊은 수심에서 잠수 중인 친구들이 몇몇 있다. 이러한 경우는 종종 내가 먼저 연락을 한다. 주로 ‘밥 잘 챙겨 먹으라’며 생사 확인을 하는 정도다. 나에게 그놈의 밥 타령은 그냥 언제든 상황이 나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만나서 또 놀자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나는 생각보다 긴 휴지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을 꽤 오래 기다리고 있다. 나도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너를 만나 환하게 웃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