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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Feb 06. 2024

01. 모던 경주의 풍경

수학여행, 금관, 그리고 낭만의 도시

수학여행의 풍경

“보성고등보통학교 직원, 생도 이십 오명은 금 이십 일일 오전 칠 시 이십 분 남대문발 부산행 열차로 출발하야 수학여행차로 경북 경주를 향하얏는대 이십 사일 경에 도라올 예정이라더라.” (1920년 5월 21일, <동아일보> 3면)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다. 달랑 4면을 발행하던 시절인데도 보성고등보통학교, 배재학교, 휘문학교 등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갔다는 단신 기사가 올라와 있다.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소식은 단신만 아니라, 아예 몇 회에 걸쳐 여행기로 연재되기도 했다. 배재학교 수학여행기는 5월 말에 3회에 걸쳐 실렸고, 보성고보의 경우는 6월 19일부터 5회에 걸쳐 실렸다. 그 시절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체적인 내용을 개관하면 이런 분위기였다. 


1920년 5월 21일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25 명의 보성고보 수학여행단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탔다. 한 학생이 늦어서 여행단이 애타게 기다리던 와중이었는데, 마침 교장선생님이 배웅을 하러 땀을 뻘뻘 흘리며 급히 나타났다. 잠시 후 빠진 학생 없이 정시에 무사히 서울을 출발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여행단은 즐거운 이야기 꽃을 피운다. 대전을 지날 때쯤 도시락을 먹고, 오후 세 시 오십 분에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유명한 대구 달성공원을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왔는데, 방이 춥고 화장실이 불편했단다. 여관 주인장은 이런 것 좀 신경 쓰라는 불평을 기사에 써 놓았다. 


이튿날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일곱 시 출발하는 경주행 경편열차에 몸을 싣는다. 경편열차는 일반열차에 비해 작고, 느린 속도로 운행된다. (경주행 경편열차는 1918년에 개통되었으니, 이들은 막 새로 생긴 교통수단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전에는 대구역에서 버스를 이용해서 경주로 와야 했다.) 여행단은 가는 길에 떠들썩하게 담소도 나누고, 노래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화역, 건천역, 서악역을 거쳐 경주역에 도착하니 열두 시 삼십 분이었다. 역에 내리니 경주군청에서 사람이 나와 맞이하고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이 당시에는 수학여행단이 경주군수와 면담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경주의 보통학교 교장선생님이 수학여행단을 안내하거나 경주의 청년들과 어울리도록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앞서 80여 명이 방문한 배재학교 여행단은 경주청년회 회원들과 친선 축구경기를 하기도 했다.) 경주의 여관주인이 선생님과 인사를 하다가, “나는 경성관립보통학교인 줄로 알았소”라며 사립학교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했다는 것도 기사에 꼬집어 놓고 있다. 


여행단은 오릉을 들러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기억하였고, 나정을 거쳐 포석정을 둘러본 후, 계림에서 김 씨의 시조 김알지 이야기를 되새겼다. 신라 왕성이었던 월성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첨성대의 내력을 살핀 후에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한참의 담소 시간을 가진 후에 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여덟 시에 불국사를 향해 길을 나섰는데 분황사, 황룡사, 안압지 등을 두루 살펴보고, 열두 시 삼십 분에 불국사에 도착했다. (협궤선 개통 뒤로는 대체로 경주역-불국사역 간 기차를 이용하곤 했다.) 점심식사와 불국사 경내 관람을 마치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까지 보았다. 날이 어둑해지기 전에 하산해서 여섯 시에 석가탑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고, 절에서 마련해 준 식사를 하고 절에서 하룻밤 숙면을 취했다. (꽤 오랫동안 불국사 방문은 일박 코스였다. 숙식은 주로 불국사에 청해 해결하곤 했다.)


마지막날은 아침 다섯 시 반부터 일어나 얼굴을 씻고, 아침식사를 했다. 일곱 시 반에 불국사를 출발해 여덟 시 십 분에 불국사역에 도착했고, 여덟 시 이십삼 분 경주행 열차를 타고 읍내로 들어왔다. 오전에는 고물진열관(古物陳列館, 당시의 경주 박물관)에 들러 여러 유물을 보았는데, 성덕대왕 신종에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남기고 있다. 점심식사 후 서악의 태종무열왕릉과 서악서원을 들렀다가, 김유신장군묘를 거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려보고, 다시 첨성대로 돌아와 거기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숙소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아침 아홉 시 십오 분 대구행 경편열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수학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오가는 교통편과 시간, 숙소의 유형 등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수학여행 일정이나 코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학여행의 원형이 이때 형성된 때문일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저학년들은 학교 인근으로 여행을 가고, 고학년이 되어서야 경주나 평양 등지를 수학여행으로 다녀가곤 했다. 1930년대가 되면, 수학여행으로 일본을 가는 경우도 늘어나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 경제적 부담이 과하다며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고, 30년대 후반이 되면 전쟁준비로 경제가 나빠져서 아예 수학여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경주는 1920년대부터 이미 수학여행의 성지가 되어 있었고, 학생들만 아니라 다양한 신분과 계층에서 찾아오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금관의 도시

근대에 경주가 가장 빛났던 시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그건 1920년대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경주의 대부분 특성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경주를 신라의 고도로 자리매김하는 대표적 계기는 석굴암의 발견(1909)과 복원(1913-15), 불국사의 복원(1918-25)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큰 사건은 1921년 우연히 경주 시내의 민가 마당에서 발굴된 금관이었으니, 최초의 신라 금관이 정말 뜻밖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훗날 금관총으로 명명된 고분의 금관 출토 스토리다. 


대략의 이야기는 이렇다. 경주 읍내를 순찰하던 일본 순사의 눈에 기이한 장면이 포착된다. 동네 아이들이 희귀한 구슬을 갖고 노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일본 순사가 그 출처를 추궁해 보았더니, 아이들은 동네 집이 수리를 하려고 마당을 파던 중에 이상한 물건들이 나오더라고 이야기를 했다. 지금의 노서리(路西里)와 노동리(路東里) 고분군은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뉜 동네에 있는 고분들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봉분이 유실되어 있거나, 둔덕 정도로 여겨졌다. 가장 큰 봉황대는 심지어 큰 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으니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도록 전망대처럼 만든 조산(造山)으로 생각했던 참이었다. 고분 위나 옆으로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상태는 2000년대까지도 유지되었다. 


거기에서 전대미문의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경주는 일약 전국적 관심의 초점이 된다. 한편으로는 총독부가 금관을 서울로 이송해서 탈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경주의 지역 여론이 급격하게 흉흉해졌다. 경주경찰서에 금관을 보관하다가 이틀간 일반 공개를 했는데, 수천 명이 몰려들어 관람을 하는 대성황을 이루었지만, 이때 경주 주민들은 금관이 서울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송되는 것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결국 시민들의 부정적 여론으로 인해 금관은 경주에 보관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시민 모금이 진행되어 일 년 후에 경주군청 안에 금관고가 만들어지고, 경주는 금관의 도시로 면모를 갖게 된다. 이어서 금령총(1924), 서봉총(1926) 등에서도 금관이 연달아 출토되면서 경주는 1920년대에 벌써 찬란한 신라의 문화를 집약한 ‘금관의 도시’로 드높은 명성을 얻는다. 


일제하의 조선에서 신라 금관의 출현은 민족의식을 강렬하게 고양시켰다. 일제는 관광도시로 개발을 하고자 발굴과 관리를 정책적으로 추진했으나, 조선사람들에게는 경주에 가서 금관을 보고 오는 것, 석굴암을 오르고, 불국사에 가보는 것이 민족운동이었고, 계몽운동이었다.  경주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도 수학여행의 도시로 위상을 굳혀갔다. 1920년대 이래로 학생들은 경주를 수학여행으로 다녀갔고, 문인들과 지식인들도 저마다의 취향과 관심사를 한껏 드러내며 경주 유람기를 남겼다. 경주는 그렇게 꼭 가서 둘러보아야 할 고적들이 가득한 도시요, 천년 신라의 고도로 찬란한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낭만의 도시

경주는 고적들만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낭만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문단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사연이 하나 있다. 1942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 문단은 어수선했다. 일제말기가 되면서 언론과 잡지는 대거 폐간이 되었다. 매체와 지면을 잃어 글을 쓸 수 없었던 문인들은 좌절감에 사로 잡혔다. 아직 문단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던 젊은 무명시인 조지훈은 어느 날 자신과 같이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 박목월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단지 같은 지면에 글을 쓴 인연만 있었던 그의 수줍은 연락에 목월은 흔쾌히 경주 방문을 청했다. 그 답장의 내용은 이랬다고 알려져 있다.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1942년 봄, 쌀쌀한 봄비 혹은 진눈깨비가 내리던 건천역에 목월은 자기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행여 지훈을 못 찾을까 우려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시골 아낙들이 내리는 플랫폼에 키가 훤칠한 장발의 청년이 하나 내렸다. 둘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고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목월이 26세, 지훈이 22세였다. 이 두 젊은 시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경주에서 꿈결같이 보름을 함께 보냈다. 같이 불국사를 가고, 석굴암을 오르고, 옥산서원에서 잠을 자고, 계림과 첨성대와 반월성을 걸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술에 취해 떨고 있는 지훈에게 목월은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고, 시내 여관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문학과 세상에 대해 끝이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자신의 시를 보이며 읽어주었다. 이 만남 후에 지훈은 자신의 시 ‘완화삼’을 목월에게 헌정했고, 목월은 ‘나그네’를 지어 ‘지훈에게’라며 애정 어린 관계를 과시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이 시들은 두 젊은 시인들이 경주를 탐닉하듯 여행하며 나누었던 문학적 우정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그들이 훗날 <청록집>(1946)의 동인으로, 한국시단에 ‘청록파’라 불리며 등장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신라 이후의 경주

경주는 신라의 고도(古都)이면서, 근현대에는 한국의 대표적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했고, 현재는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을 4곳 보유하고 있는 국제적인 문화도시이다.  경주의 주요한 문화유산은 신라시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과 근대의 경주에서 형성된 역사와 문화 역시 그것대로 충분히 알려지고 제대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경주는 신라의 고도(古都) 란 회고적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기에 고려나 조선시대에 경주에 부임한 관리들이나, 경주를 다녀간 선비들은 저마다 ‘동도회고(東都懷古)’란 글을 남기곤 했다. 그런 글에는 의례적으로 천년왕국 신라의 영화를 회고하며, 경주 출신인 고운(孤雲) 최치원과 경주에 정착해서 한동안 살았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자취가 언급되곤 했다. 화담(花潭) 서경덕을 위시한 여러 선비들은 경주의 절경을 '삼기팔괴(三奇八怪)' 등으로 이름 붙여 상찬 한 시를 지어서 후대에 회자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신라 이후의 경주에 대한 연구는 아직 대중에게 다가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는 압도적으로 신라와 동일시되고 있는 분위기가 있어서 학술연구도 여전히 신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경주시의 문화재 관련 부처의 정책과 사업도 경주에서 신라가 아닌 다른 시대에 대한 관심을 많이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긍정적 변화는 경주 지역의 대학에 있는 학자들 중심으로 ‘경주학’이란 이름으로 경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학술적 논의를 해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연구를 하는 재야의 학자와 단체들도 고려와 조선의 경주 논의를 담은 고문서를 수집하고, 번역해서 출간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런 작업이 한동안 축적이 되면 훨씬 단단한 근거 위에서 경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규명해 보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된다. 


대중적인 역사 인식에서 대표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신라의 멸망과 관련된 대목이다. 신라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했고, 56대 경순왕 때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넘기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신라의 마지막 황태자는 베옷을 입고 역사의 무대에서 행적이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마의태자’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들은 신라의 패망 이후 경주는 폐허가 되고, 완전히 그 위상을 상실한 지방도시로 전락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에서 경주의 위상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첫째, 신라는 고려와 전쟁을 벌여 패망한 것이 아니라 항복하고 나라를 내어주어 흡수통합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실은 왕건과 혼인으로 맺어짐으로써 자연스럽게 고려의 왕족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여러 세력과 정략결혼을 해서 왕비가 수십 명에 달했기 때문에 신라 왕족이 고려 왕족으로 편입되었다고 해서 대단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인관계로 이어진 중에서도 태조 왕건의 가장 유력한 왕비가 신라 왕실에서 나왔고, 이후 고려왕조가 안정화되는 시기 경종의 왕비가 신라 경순왕의 딸로 알려지는 바, 신라 왕족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권력 구조 안에 성공적으로 기반을 만들어 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주는 그 권력 기반의 배후 지역으로 일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고려는 불교가 국가 종교였다. 신라가 불교 수용 이후 누려온 종교적 구심점 역할은 쉬이 소멸되지 않았다.


둘째, 경주의 지역적 위상도 급격히 격하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에 약 천 년간(BC 57년 - 935년) 유지된 신라(新羅)의 수도는 계림(鷄林), 혹은 서라벌이라고 불렀고, 이는 종종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고려의 지방 편제에 따라 이를 경주(慶州, 935)라고 개칭했다. 여기에는 수도로서의 위상을 격하하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무색하게 하듯 경주는 고려시대에는 3경(개성, 평양, 경주)의 하나였고, ‘동쪽의 수도’란 뜻으로 동경(東京) 혹은 동도(東都)라고 조선시대까지 불렸다. 고대 신라의 수도란 상징적 위상도 있었지만, 실제로도 한반도 동쪽의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로 기능을 했었다. 조선이 건국되어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이 지역은 경주부(慶州府, 1394)로 불리게 되었는데, 개국 초기부터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국의 3대 도시(평양, 전주, 경주) 중 하나였다. 경주는 경상도 관찰사가 거주하며 경상도 전체의 행정을 관할하는 곳이었으며, 경주부윤은 종 2품의 대신급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경상도(慶尙道)란 명칭 자체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임진왜란을 거치며 선조 때(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규모나 위상 면에서 경상도를 대표하는 가장 큰 도시였다. 


신라 이후의 경주에 대한 개관적 소개만으로도 우리의 역사 인식에는 꽤 교정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모던 경주’라고 명명한 1860년에서 1945년까지의 경주의 시공간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작업이 오늘의 경주를 새롭고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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