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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Feb 09. 2024

02. 동도(東都) 경주

신라 이후의 경주

임금이 말하기를, "경주는 우리나라의 거읍(巨邑)이라서 반드시 대신급을 택하여 가서 다스리게 하는 법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세종실록 20년 8월 26일)


동도 경주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이 온라인 공개되어 있는 덕분에 우리는 그때 왕실에서 무슨 논의를 했는지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세종은 우승범에게 경주 부윤(府尹)으로 갈 것을 명하면서 위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전국을 팔도로 편제해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있었고, 지방조직으로는 가장 상위의 부(府, 4개소), 대도호부(4개소), 도호부(20개소) 등으로 구분해서 통치하고 있었다. 경주는 4개의 부 중 하나였는데, 위에서 살펴보았듯 주로 종 2품이 임명되는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경상도 관찰사는 경주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했으니, 경주는 명실상부 경상도의 중심도시였던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경주’에 대한 언급은 꽤 많이 등장한다. 가장 초기에 두드러지는 이슈는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을 두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태종에서 세종 시기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전국의 3곳(평양, 전주, 경주)에 어진을 모시도록 한다는 결정에 따라 경주에 집경전(集慶殿)을 세우고, 관리자를 두고, 비용을 조달하는 문제를 상세히 의논하고 있다. 경주의 위상이 전국 3대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는 방증이다. 임진왜란이 지나면서 선조 때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가고, 관찰사의 근거지도 경상도 내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서 경주의 압도적 지위는 변모하게 된다.


그런데, 세종이 경주 부윤의 위상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신급 관리들에게 발령을 내어도 잘 가지 않으려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공무원 조직에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조선의 관직은 그러했다. 임금이 어느 지방 수령으로 누군가를 임명하면 당연히 어명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 병을 핑계로,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아직 상중이라는 이유로 부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의 선비들 중에는 관직에 나아가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현실 정치의 세계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의 향방에 따라 출세와 몰락이 순식간에 일어나곤 했다. 이런 난리에 끼이고 싶지 않아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머물며 후학을 키우는 이들도 많았다. 퇴계 이황의 경우도, 늘 한사코 관직을 사양하거나 마지못해 관직에 나갔다가도 금방 건강을 핑계로 사직하곤 했다.


게다가 그간 경주를 다녀간 수령들의 이름과 임기를 기록하고 있는 <경주선생안>의 자료 등을 살펴보면, 놀랄 정도로 임기가 짧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세종 때는 임기를 육 년 혹은 삼 년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크게 있었고, <경국대전>에서는 결국 오 년으로 정해졌는데, 정작 실제 현장에서는 육 개월 혹은 일 년 단위로 부윤이 바뀌었다. 도대체 이래서 국가 운영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임기는 짧았고, 그나마 부임을 하지 않아 공석인 경우도 많았고, 어떤 경우는 부임해서 오는 데 한두 달이 걸려서 다음 임지로 떠나는 것을 감안하면 불과 몇 달 머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관리들은 웬만큼 조건이 좋은 보직이 아니면 여기저기 발령받는 것을 버거워했고, 관행적으로 지방관을 하면 중앙직을 한번 하거나 반대로 중앙직을 하면 지방관을 하는 식으로 직제를 운영하기도 했다. 경주는 한때 부임한 수령이 3 연속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후임자들이 잘 오려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자 왕이 부임을 거부한 이들을 처벌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이 중앙집권적 왕권국가라고 해도 그 당시의 국가가 오늘날처럼 착착 돌아가는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이 이런 관리 임명과 파견 절차에서 절로 드러난다. 중앙정부는 파견된 관리들을 통해 지방 향리들이 토호세력화 하거나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도록 견제하고 통치하는 역할을 기대했으나, 이들은 임기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문제가 있었다. 도관찰사들은 일 년에 두 번씩 지방관의 복무실태를 평가해서 인사에 반영했고, 중앙에서는 가끔씩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지방관의 불법, 탈법 상황을 직접 바로잡기도 했다.


19세기의 조선과 동아시아

조선의 19세기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관철하려고 했던 군주 정조의 죽음(1800)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어진 순조(재임 1800-1834)에 이어 헌종(재임 1834-1849)과 ‘강화도령’ 철종(재임 1849-1863)의 시대는 역사적으로 ‘세도정치의 시대’라고 불린다. 어리고 미숙한 왕을 세워놓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외척들이 세력을 떨치며 국정을 좌우하는 시대였다.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 가문 등이 번갈아 가며 권력의 핵심을 이루었다. 왕권은 취약하고, 외척이 득세한 시대에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살피는 이들은 없었다. 여러 번 심각한 풍수해 피해가 실록에 언급되는데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오히려 세금 착취와 부정부패 사례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암행어사가 한번 파견되면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파직되었지만, 조선이란 체제는 여러 면에서 기울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민간에서는 <정감록>이 읽히고, 서북지방에서는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났다. 18세기부터 유입된 서학은 체제의 위협요인으로 간주되어 대대적 박해를 받고 있었다. 조선은 안팎으로 위태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이 세도정치로 내부의 권력을 위태롭게 유지하던 시기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더 크게 체제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아편전쟁(1840-1842)을 벌이고 패배한 후 난징조약(1842)을 맺는 등 형편없이 위상이 흔들리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홍수전이 이끌었던 태평천국의 난(1850-1864)으로 대혼란을 겪는다. 일본은 개항(1854)과 메이지유신(1868)으로 이어지는 개화노선을 발 빠르게 채택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서양세력과 각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일전쟁(1895) 등으로 직접 맞닥뜨렸다. 1860년대부터 조선은 내부 모순을 해결하는 과제만 아니라 격렬한 대외조건과 맞싸우며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처지였다. 고종(재임 1863-1907)의 시대, 특히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재임 1863-1873)이 집권한 시기는 여러모로 500년 왕조 조선이 그 명운을 다하고, 식민지와 근대 국민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의 온갖 풍파를 맞닥뜨려야 했던 결정적 전환의 시기였다.


'경주 읍내 전도' <집경전구기도>(1798)에 첨부되어 있다.

왕경에서 읍성 체제로

19세기의 경주는 ‘읍성(邑城) 체제’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라시대의 경주는 왕궁이 있는 월성과 그 인근(첨성대, 황룡사, 동궁과 월지 등)을 일컫는 ‘왕경(王京)’이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왕경 체제’였다면,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왕경 북쪽의 터에 동서남북으로 성벽을 두르고 사면으로 대문을 내어 읍성을 세우고 읍성 내부의 기관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 양태를 ‘읍성 체제’로 불러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읍성의 내부에는 행정기구인 동헌으로 일승각(一勝閣) 등 여러 건물이 있었고, 주요 문서를 관리하고 관리들을 대접하는 객사 동경관(東京館), 죄수를 가두는 감옥 등 주요한 권력 기관들과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 등이 있었으며, 양반과 관리들의 집과 밭이 있었다. (이 시기 동헌 건물은 일제강점기에는 군청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경주문화원’이 되어 예전 모습을 일부 복원하였고 전시공간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가면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를 볼 수 있다.)


읍성은 사면으로 대문을 두었고(현재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성벽 일부가 ‘경주 읍성’으로 복원되어 있다) 사대문을 통해 읍성 외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읍성의 서쪽 형산강 변에는 군영이 있었고, 북문 밖 북천 건너편에는 신라시대 이래로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된 고성숲(현재의 황성공원)이 존재했다. 서천과 북천은 종종 범람하는 일이 있어서 백성들은 주로 읍성의 남쪽에 많이 살았는데, 현재의 대릉원과 봉황대 인근 고분 주변에서 반월성 동쪽에 향교가 있는 교촌마을까지 주요 주거지로 활용되었다. 읍성에서는 거리가 멀지만 경주 이 씨와 손 씨 집성촌이 있는 안강 지역이나 현곡 지역 등도 일정한 규모의 인구가 거주했다.


월성 동쪽 편은 신라시대에는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데,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향교(鄕校)가 설립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주향교는 경상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여기에는 공자, 맹자, 주자 등 중국의 주요 성현들 외에 특별히 신라 2현으로 설총과 최치원을, 고려 2현으로 안향과 정몽주, 조선 14현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을 모시고 있다. 향교 인근에는 과거시험을 통과한 진사와 생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인 사마소(司馬所)를 세워서 교육과 여론형성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 중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 출신의 회재 이언적(1491-1553)은 퇴계 이황(1502-1571)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경주 안강에 옥산서원을 세운 조선 성리학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경주 지역의 사림은 퇴계학파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고 남인세력들이 주도적이었다. 그런데, 당대에 퇴계를 능가할 정도의 유력 인물이었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따르는 이들도 일부 존재했다. 서인의 거두였던 우암이 2차 예송논쟁에 패하고 포항 인근 장기에서 4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다시 거제로 이송되던 길에 경주를 들러 포석정 인근에서 묵은 적(1679)이 있었다. 이때 경주에서 그를 만난 이들과 우암의 제자들이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그의 영정을 모셔와서 경주 포석정 근처 봉암산 자락에 봉암영당을 세우게 된다(1719). 몇년 후 중앙의 권력이 다시 바뀌면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노론인 우암에 대해 소론과 영남 남인들이 합세해서 공격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경주 부윤과 울산 부사의 사주를 받은 선비 수백 명이 경주의 영당으로 몰려와 격투극을 벌이고, 이를 말리던 선비 한 명이 사망하기까지 하는 사건(1722)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얼마뒤 중앙권력이 노론의 손에 들어가자 다시 들춰져서,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을 삭탈관직하고 10명의 경주 선비들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를 경주지역에서 벌어진 사화라 해서 계림사화(1725) 혹은 을사사화라고 부른다. 노론 세력들은 남산의 상서장 인근 인왕산에 인산영당을 세우고(1725), 여기에 위패를 모시면서 인산서원(1764)으로 이름을 고쳐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146년간 유지되면서 영남 노론 세력의 주요 구심점 역할을 하였는데, 이후 서악서원과 경주 향교의 주도권을 장악해서 지역 내 선비들과 각축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으로 인산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원은 문을 닫게 된다. 다만, 안강의 옥산서원, 경주의 서악서원 등은 전국의 주요 서원 47개소에 포함되어 계속 유지되었다. 


경주의 지역 사회

구한말 조선 최고의 부자 중 하나로 알려진 경주 최부자집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의병장 최진립(1568-1639)의 집안이다. 그의 손자인 최국선 대에 와서 내남면 이조리에서 많은 토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과 모내기법 등 농업혁신으로 만석꾼의 부를 일구면서 최부자집의 신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소작인들을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당시 부잣집을 공격하던 명화적(明火賊) 중에 자기 소작인이 있음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후 빚문서를 불태우고, 소작인과 소득을 반씩 나누는 반분법을 도입하고, 중간관리자인 마름을 없애고 소작인을 직접 만나 어려운 사정을 듣는 등 해결책을 모색했다. 최부자 집은 1779년 내남에서 교촌으로 이사를 와 집을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최부자집은 집안에 전해오는 육훈(六訓)으로 유명하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하지 말라. 둘째, 만 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 넷째,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이 그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의 대표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에서 최부자집의 위상이 높은 것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주를 방문하는 유력한 인물들이 으레 들러 묵고 가는 곳이었고, 일반 과객들도 후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최부자집에 들러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최부자집은 다양한 정보와 논의가 오가는 지역 사회의 최대 구심점이기도 했다. 또한 문화예술에 능한 가객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했고, 지역 혹은 전국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에 선뜻 거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최부자집의 이런 지역 내 위상은 결국 이 집안이 일제강점기에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이는 이후 장에서 별도로 살펴볼 내용이다.

 

‘읍성 체제’의 경주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감지하면서도 지방도시로서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일구어 가고 있었다.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들이 수시로 들고 나고 있었고, 지역 출신으로 과거에 나가 명예와 지위를 얻은 이들과 서원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유림들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만석꾼 부자도 있었고, 민간에는 봉이 김선달에 버금가는 재담꾼으로 전국적 명성이 높았던 경주 출신 정만서 같은 이도 있었다. 19세기 경주 지역사회는 곧 닥쳐올 엄청난 규모의 시대적 전환을 충분히 의식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여러 위기와 격랑을 경주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은 경주는 이런 위기의 가장 강력한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말 내부에서부터 분출하는 가장 격렬한 한 운동이 경주에서 등장한 때문이다. 그것은 경주가 시대의 모순이 작렬하는 변방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시간 응축된 역사의 화산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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