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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Feb 13. 2024

03. 조선말 최대 사건, 동학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한 사건


동학이란 위협

1863년 12월 20일이었다. 조정은 경주에서 일어난 한 사건의 보고로 소란스러웠다. 불과 며칠 전인 12월 8일 조선의 25대 국왕 철종(재위 1849-1863)이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 조정은 미리 준비한 장례절차를 진행하였고, 대왕대비는 차기 왕위 계승자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지명하였다. 그가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다. 국장과 왕위계승 절차가 진행되던 긴박한 와중에 선전관 정운귀가 조정에 올린 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신이 11월 12일에 공손히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豐)·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청 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등지에서 동학(東學)의 괴수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염탐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최 선생(崔先生)이 혼자서 깨달은 것이며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에 도착하는 날부터 장시(場市)와 사찰(寺刹) 사이에 출몰하면서 나무꾼과 장사치들과 왕래하니, 혹은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하고 혹은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최 선생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명(兒名)이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이 제우(濟愚)로서, 집은 본주(本州)의 견곡면(見谷面 * 현곡면의 오기) 용담리(龍潭里)에 있었는데 5, 6년 전에 울산(蔚山)으로 이사 가서는 무명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혹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한답니다. 사람들은 본래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홀로 ‘선도(善道)’라고 한답니다. 대체로 그 도(道)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몸과 입을 깨끗이 하고서야 열세 글자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전수해 주고, 또 그 다음에 여덟 글자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을 전수해 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면하고 병이 제거되며 신명을 접하게 된다는 등의 말로 속이고 홀리면서 권유하는 바람에 그 말에 빠져들어 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글자를 모르는 아녀자와 아이들도 미쳐 현혹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약을 먹는 법이 있는데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이 학설에 전심하여 다시 깨달으려는 생각이 없으며 혹 약을 먹는 중에 금기하는 일을 조심하지 않다가는 크게 광증(狂症)이 나서 남의 눈을 빼먹고 그 자신도 스스로 죽고 만다고 합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돼지를 잡고 과일을 사서 궁벽한 산 속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는데, 지금 이 괴수 최가의 집에서 금년만 해도 여러 차례 모여서 강설(講說)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처음 배울 때에도 예물이란 명목으로 전부 선생에게 바치고, 전도를 받아 깨닫게 되면 재산을 털어 선생한테 주되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도를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최가가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고 끝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 남짓 뛰어올랐다가 한참 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최가가 잡혀 진영(鎭營)에 갇히게 되자 제자 수백 명이 와서 호소하기를, ‘저희들의 공부가 본래 백성을 해치고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니, 저희 선생님을 속히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답니다. 진영에서 즉시로 놓아주니, 몰려다니면서 의심할 만한 자취를 보이지 않았고 또한 비상(非常)한 일을 꾸민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근을 막론하고 공부하러 오는 자는 날마다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전해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는 황당한 내용이 있어 그대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달 9일에는 따로 양유풍 등을 곧바로 최복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어서 자세히 염탐해 오게 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꽤 길게 쓰여진 보고 내용은, 우선 경주에 이르는 길에 이미 동학이 매우 왕성하게 세력을 뻗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최제우에 대한 백성들의 호응이 꽤 긍정적이란 인상을 받았으며, 그는 열세 글자와 여덟 글자 주문을 외우게 하고, 약을 지어 먹이며, 산에서 제사를 지내며 귀신이 내려오게 했다는 내용이다.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은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과 귀신을 내려오게 하고 칼춤을 추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등의 사술로 백성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운 최제우

칼춤을 추는 사람

첫 보고는 동학도들의 상황과 분위기를 살피고 나서 최제우를 체포한 다음 조정에 처리방안을 묻는 것이었다. 이듬해 2월 29일 경상감사 서헌순은 그간 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보고를 올렸다. 역시 꽤 긴 내용인데, 주목할 대목은 최제우 본인의 입으로 동학의 취지를 밝혔다고 볼 만한 부분이다.


“제가 경신년(1860) 경에 듣건대, 양인(洋人)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 우리나라로 오면 그 변(變)을 장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13자로 된 주문(呪文)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쳐서 양인을 제어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정성을 다하면 이롭지 않은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인의 책은 반드시 규(�)로 이름을 달았는데 그 글자는 「궁(弓)」자의 밑에 두 점을 찍은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마셔서 액운을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에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천신(天神)이 내려와 가르치기를,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인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검가(劍歌) 한 편을 주었습니다. 문(文)을 짓고 부(賦)를 지어 불렀는데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동학의 문제의식에는 서양인들이 중국 다음으로 조선을 넘볼 것이란 위기의식이 있었다. 그것을 대응하려는 와중에 자신이 경험한 모종의 종교체험이 주문과 영부와 검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도 자신이 백성을 갈취하거나, 현혹시킬 의도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고, 관에서 듣거나 말거나 자신이 종교적 활동을 통해 나라에 임박한 사회적 위협을 대처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관이 의심을 풀 수 없었다. 최제우의 추종자였던 이내겸의 진술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최복술이 이른바 검가(劍歌)라고 하는 것은 ‘때로구나, 때로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이검(龍天利劍)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만대에 한 번 태어난 장부요, 5만 년에 한 번 만난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검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춤추는 소매에 긴 장삼을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바로 잡고 호호 망망 넓은 천지에 한 몸을 기대고 서서 검가(劍歌) 한 곡조를 부르노라. 때로구나 때로구나 노래를 부르니 날이 퍼런 용천검이 해와 달에 번쩍이는구나. 늘어진 소매가 달린 장삼으로 우주를 덮으리. 예로부터 이름난 장수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장부가 앞에 나서니 장사도 소용없구나. 때로구나 때로구나, 좋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좋구나.’라는 것입니다. (이하 생략)”


때가 왔다는 것. 날이 시퍼런 용천검을 들어 쓸 때가 왔다는 것. 5만 년에 한 번 만나는 그 때가 왔다는 것. 이런 노래를 부르며, 검을 들고 펄쩍 펄쩍 뛰는, 일설에는 한번 공중에 오르면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검무를 추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런 최제우를 따르는 무리들이 조령 아래 경상도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고, 자신들이 동학을 따른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위협적이지 않았을까?


청나라의 혼란한 사정은 조선에도 꽤 알려져 있었다.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1840-1842)에 패배한 후 굴욕적인 난징조약(1842)을 맺어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홍수전이 이끌었던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18세기말에 ‘백련교의 난’으로 청나라가 한번 흔들렸던 적이 있다. 조선에서는 이제 막 철종에서 고종으로 왕위 이양이 이루어지던 중이었다. 혼란한 국정을 돌보아야 하던 대왕대비는 “‘죄를 다스리는 데만 치우치지 말고 불쌍히 여기라’는 훈계는 바로 이런 무리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미쳐서 몰려다닌 행적에 대해서는 뭇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한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교하고, 적절한 처벌을 명했다. 3월 2일 의정부는 동학도들이 중국의 황건적이나 백련교와 같은 무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들을 모두 중벌에 처할 것이 마땅하나 대왕대비의 뜻을 받들어 두목인 최복술만 처형할 것을 건의하였고, 대왕대비는 이를 윤허했다.


최제우에 대한 효수형은 그해 4월 15일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가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도를 깨우치고(1860년 음력 4월 5일), 일 년간 홀로 수련한 후, 자신의 가르침을 ‘동학’이라 명하며 공개적으로 뜻을 펼친 지(1861년 6월) 불과 삼 년이 되지 않는다. 조정에서는 동학이라 칭하며 서학과 다름없는 행태로 백성을 미혹한 도당의 괴수를 본보기 삼아 참수했으므로 이제 이 사교집단은 소멸할 것으로 생각했다. 불과 한 세대만에 몰락한 것은 조선이요, 떨쳐 일어난 것은 동학도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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