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낳은 불온한 사상
때로는 ‘동학난’으로 때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현재 공식 명칭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은 19세기 말 조선의 역사를 전후좌우로 뒤흔든 대사건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개별 사건 자체도 나라 전체를 뒤흔들만 한 규모였지만, 그에 이르는 30년간의 상황 전개도 매우 흥미롭고, 그 이후 30여 년간의 일제강점기에 끼친 영향력도 만만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모든 일이 경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지역 내에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1824년 10월 28일(음), 아명 최복술 혹은 최제선이라 불리었던 최제우는 경주 인근 현곡리에서 유력한 한학자였던 아버지 최옥과 개가한 어머니 아래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가였던 가정에서 자라났고, 십대 중후반 이후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로 보낸 후 스물 한 살부터 십 년간 전국을 떠도는 주유팔로(周遊八路)를 시작했다. 이 시기 그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으나, 행상을 하며 나라 안팎의 흐름을 읽는 자기 나름의 안목을 얻은 것 같고, 시운이 다한 유교나 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갈망을 갖고 탐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54년부터 울산의 처가집과 천성산 등지에서 수행을 계속 했는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으나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1859년 10월 고향인 경주 현곡의 용담으로 돌아와 수련에 정진하다 1860년 4월 5일(음)에 하늘로부터 동학의 핵심을 이루는 깨달음과 주문, 영부(靈符)를 받는 결정적 종교체험을 한다. 이후 일 년 넘게 홀로 정진하며 종교적 체험을 더 심화하고, 가르침을 시나 노래로 계속 남긴다. 1861년 6월 <포덕문>을 쓰고, 용담에서 본격적으로 공개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1861년 11월 몰려드는 사람들과 관의 지목을 피해 남원 은적암으로 들어가 1862년 3월까지 은거한다. 1862년 다시 경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9월에 소요 우려로 관아에 체포되어 구금되나, 동학도 700여명이 몰려와 항의하자 수령이 풀어주었다. 1862년 11월 흥해로 가서 은거하다, 신도들을 불러모아 12월에 '접'을 구성하고, '접주'를 임명하는 등 조직을 정비했다. 1863년 3월 용담으로 돌아와 포교활동을 다시 전개했다. 8월 14일(음)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임명한다. 12월 10일 선전관 정운귀 등에게 동학도 수십 명과 더불어 체포되어, 심문받고, 이듬해인 1863년 3월 10일(음) 대구감영에서 참형을 당했다.
수운의 처형은 과잉대처의 느낌이 없지 않다. 그가 조직적으로 세를 모아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사건을 벌인 것도 아니고, 동학운동이나 수운 개인으로 인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정통적인 가르침이 아닌 것에 백성들이 뜨겁게 호응하고 있었고, 급격히 세를 불려가고 있었던 것이 불안했고, 그것을 사회적 위협이라 느낀 것이다. 그만큼 19세기 중후반 조선사회는 불안정했다.
동학에 대해 가장 격렬히 적의를 드러낸 이들은 영남의 유림들이었다. 이들은 1863년 9월과 12월에 상주 등지에서 모여 경상도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 통문을 보내서 동학이 이단적 사상이며, 이름만 동학일뿐 사실상 천주를 받드는 서학과 동일한 사교이므로 배척해야 하며, 마땅히 관에 고발해서 처벌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최제우와 동학도들을 잡아들인 것은 이런 배경이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조의 처형과 동학 자체에 대한 탄압으로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던 동학은 제2대 해월 최시형(1827-1898)에 의해서 극적인 기사회생을 하게 되었다. 마치 기독교 역사의 예수와 바울의 관계처럼, 불과 공개적 포교활동 2년 반만에 처형 당한 스승의 삶과 가르침은 그의 제자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최시형은 관의 지목을 피해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깊은 산악지대를 잠행하며 동학도들을 찾아가 가르치고, 수행하고, 포교했다.
수년 만에 동학의 교세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교조신원운동’을 빌미로 최시형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이필제란 인물이었는데, 그는 이미 여러차례 봉기와 소요를 일으킨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온적이던 최시형은 결국 그의 제안에 응하게 되는데, 1871년 3월에 영해의 관아를 습격하는 ‘이필제의 난’이 벌어진다. 동학도 500여명이 동원되었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무기를 탈취하고, 영해 부사를 살해했다. 식량과 돈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지만, 이들은 곧 관군에게 반격을 당해 수십 명이 사망하였고, 이필제는 도망쳐서 문경새재에서 봉기를 준비하다 잡혀서 처형당했다. 최시형은 강원도 영월 깊은 산중으로 도피했는데, 이로써 동학은 교조의 처형 이후 10년간 쌓은 재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쓰라린 시간을 맛보게 된다.
1870년대 내내 최시형은 잠행에 잠행을 거듭하며 동학도들을 돌아보고, 동학의 가르침과 예식을 정립하며 수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로 1880년 <동경대전>, 1883년 <용담유사> 등 경전을 간행할 수 있었고,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까지 동학은 관의 주요한 관찰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꾸준히 확장되어 갔다. 훗날 호남권의 접주로 활동하게 되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1880년대 중반 이후에 동학에 입도했다. 이들은 주로 서당 훈장 같은 가난한 양반이거나 중인 계층이었는데, 당시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에 항의하고 지역사회를 돌아보는 활동으로 농민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동학에 대한 관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92년 가을부터 ‘교조신원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11월 1일 삼례에서 신원운동을 위해 수천 명이 집결하여 세를 과시하자, 관은 이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동학도들은 조정에 상소를 하기로 방향을 정하고, 1893년 2월 10일-11일 광화문에 자리를 펴고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당한다. 3월 15일 ‘척왜양(斥倭洋)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고 보은에서 열린 집회에는 최시형이 참가한 가운데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어윤중이 관찰사로 이들을 면담하고 나서 동학도들은 해산하였으나, 정부에서 주모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관계는 악화되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호남지역에서는 1893년 말부터 고부 군수의 학정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있었다. 이에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2월까지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어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봉기를 결의하고, 3월 20일 백산으로 총집결한 만여 명의 동학군은 태인, 금구, 부안을 거쳐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하고, 4월 11일에는 전주성에 입성하면서 전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였다. 최시형은 이때까지만 해도 군사행동에 조심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상황을 접한 조정은 패닉상태에 빠져들어서 청나라를 끌어들여 동학군을 제압하고자 하는 치명적 오판을 하게 된다. 조선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 900명이 5월 5일 아산으로 상륙하자,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등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텐진조약의 내용을 들어 5월 7일 인천으로 400명을 들여보내고, 바로 서울로 들이닥쳤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 전개를 보고 청일의 개입을 우려해서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조정은 일본군에 철수를 요청했으나, 이는 묵살되었고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승리한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고, 고종과 대신들 압박해 김홍집 친일 내각을 세웠다. 이미 일본은 궁궐 내에서도 군사력을 함부로 쓰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국의 동학군은 최시형의 총기포령을 따라 1894년 10월 6일 보은에 집결하고, 논산에서 호남의 동학군과 합류해서 전투를 시작한다. 10월과 11월의 여러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하면서 제2차 봉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11월 25일 전봉준이 체포되고, 1895년 3월 30일 전봉준, 손화중 등이 처형되었다. 4월까지 산발적 전투는 있었지만, 승패는 기울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최시형은 다시 긴 잠행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일본이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미사변)을 일으키면서 조선은 대격랑으로 빠져들어갔다. 조선의 국운은 완전히 기울었고, 일제의 조선 강점은 시간 문제였다. 해월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 충북 옥천에서 체포되고, 6월 2일 처형되었다. 향년 71세였다. 34세에 동학에 입문해 짧은 시간 만난 스승과의 인연이 그로 하여금 37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감내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놀라운 활동으로 한순간에 꺼져버릴 수도 있었던 동학의 가르침과 영향력은 놀랍게 다듬어졌고 넓게 확산되어 갔다.
동학은 종교로 시작했으나 사회운동, 그것도 ‘농민혁명’ 혹은 ‘농민전쟁’이라 불리는 수준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몰고온 사건이었다. 동학이 기포령을 내렸을 때 모인 농민군의 숫자는 적게는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기를 잡았을 때는 전라북도 전체를 장악했고, 조정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서 외세를 불러들여야 한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그들은 이런 상황 전개를 보면서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스스로 해산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전략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기민한 체제를 꾸렸다. 와해된 지방의 행정조직을 대체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어서 운영하였고, 노비 해방과 과부의 개가, 적서 차별을 시정하도록 하는 인권 사상도 선도적으로 내보였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받지만, 동학의 후예들이 이후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으로 진출하고, 천도교가 삼일운동 같은 대중적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는 동학에 잠재된 사회성이 적절한 시대적 상황과 만나서 근대적 시민사회를 발현시킨 중요한 역할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어떤 사회적 사상이나 운동이 높이 평가받으려면 그 개별 사건이 당대에 끼친 직접적 영향의 중대성이 인정되어야 하겠지만, 그 이후 시대에 남긴 간접적 영향력의 차원도 무시할 수 없다. 아쉽게도 경주는 동학사상이나 운동의 차원에서 그리 적극적인 평가와 계승 노력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그동안은 주로 역사학계에서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동학운동을 중요하게 논의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은 한국사상의 측면에서 동학의 가르침과 실천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평가하려는 노력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논의 중에는 경주 출신 근대 사상가 김범부 선생이 동학을 풍류도의 근대적 발현이라고 주장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입장일텐데, 풍류도가 화랑도를 설명하는 데에 핵심으로 언급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고대 경주의 독특한 사상적-종교적 배경이 동학까지 이어져온다고 파악한 것은 매우 독창적인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입장은 7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사상가였던 김지하 같은 이도 공감을 표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경주라는 지역성과 동학의 등장 사이의 관련성은 앞으로도 더 깊이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 실천적 차원이 어떻게 계승될 수 있는지도 마찬가지로 격렬한 토론이 필요하다.
동학과 그 주요 인물들은 19세기 조선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은 가장 핵심적 사건의 주요 행위자들이었다. 그들의 사상, 판단, 선택, 행동이 그 시대에 제각각 분출되던 수많은 다른 가능성을 열거나 닫아버리면서, 역사는 현재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방향으로 흘러오게 되었다. 역사는 엄정한 것이지만, 만약 동학도들의 봉기가 성공했다거나, 동학의 가르침이 양반사회의 반발이 아니라 각성을 불러일으켰다면 그후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19세기 중후반 경주라는 시공간은 조선, 혹은 한국 근대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아니 적어도 그 방향 설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주요한 인물과 사건이 배출된 곳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경주라는 시공간이 시대의 흥망성쇠와 무관했던 것처럼 무심하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주의 공기에 스민 역사의 무게를 한번 심호흡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