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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Feb 23. 2024

06. 관광도시 경주와 그 명암

유람에서 관광으로

유람과 관광

경주가 관광도시로 명성을 얻은 것은 언제일까? 자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질문을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해 보아야 명확해질 것이다. ‘관광(觀光)’이란 말은 중국 고전의 ‘관국지광(觀國之光)’이란 표현에서 비롯되었는데, ‘타국의 뛰어난 문물을 관찰하는 행위’를 말한다. 거기에는 타국이나 타지로 이동하는 여행, 선진국의 탁월한 문물을 보며 느끼는 경탄, 여기서 배우고 새길 것을 시나 그림 등으로 표현하는 감상 행위 등 다양한 영역을 포함한다. 오늘날의 관광 개념에는 여기에 휴식, 오락 등의 차원이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고, 상업적 고려 혹은 더 나아가 산업정책적 관심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주는 신라의 고도(古都)로 유명하고, 신라가 패망한 이후에도 고려, 조선 시대 내내 동경(東京)으로 불리며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해 왔음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경주를 다녀가던 이들의 주된 정조는 ‘회고(懷古)’였다. ‘옛 자취를 돌이켜 생각’할 때, 경주만큼 그 소재가 깊고 넓은 도시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경주를 다녀가며 한시를 남긴 이들이 ‘동도회고(東都懷古)’란 제목을 유독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그들의 눈에는 천년 왕국의 영화가 이제는 허물어진 궁터와 절터와 석탑으로만 남아있다는 인생무상의 일깨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이 경주에 오면 주로 둘러보았던 발자취가 신라말의 고운(孤雲) 최치원, 조선 초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흔적이었던 데에서 알 수 있듯, 지조를 지켰으나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초연히 자신의 길을 갔던 선비의 행적을 눈에 넣고, 가슴에 담아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회고의 여행은 ‘관광’의 문자적 의미와 잘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란 차원에서 ‘유람(遊覽)’이라고 쓰는 것은 자연스럽겠으나,  ‘관광’의 원래 뜻에 깊이 스며있는 경탄과 화려함의 정서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관광에서는 부각되기 마련인 ‘미식과 유흥을 즐기는 여행’이란 특성도 과거의 경주를 상기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경주를 관광도시라고 말할 때에는 이런 고전적인 유람의 이미지가 먼저 해체되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관광지로 재구성되는 과정이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났겠구나 짐작을 할 수밖에 없다. 과거 ‘유람’이나 ‘회고’의 행위가 지식층이나 특권층에나 가능했던 일이라면, 지금처럼 시간과 경제적 여유만 허락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관광의 시대가 열린 것은 아마도 근대로 진입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발생적인 전환이라기보다는 여행을 하는 이들의 규모가 대대적으로 늘어나면, 당연히 이에 따라 관광 자체가 상업적 이익을 산출하게 될 것이고, 이를 더 큰 규모의 산업적 차원으로 확장하려는 국가나 사회 차원의 의도적인 개입이 있었지 않을까 질문하게 된다. 즉, ‘경주는 관광도시’라는 말은 경주가 근대적 사회로 진입하던 시절, 아마도 일제강점기 즈음에 주요하게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영향력이 과연 얼마나 어떻게 관철되었을까,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도달한다.


경주에 대한 일본의 관심

동경제국대 건축학과 교수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68-1935)는 1902년에 조선의 주요한 건축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해서 <한국건축조사보고>를 발간했다. 그의 작업은 매우 큰 관심을 받았고, 그는 1909년부터는 매년 조사를 수행하였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1930년대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전국의 고적과 유물들은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는데, 이는 동시에 유물들의 전국적인 밀반출과 이동이 가능한 방대한 자료 체계가 구축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조선의 문화유적에 대한 근대적인 조사와 기록은 늘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한반도와 정복전쟁으로 크게 세 번 조우했다고 말한다. 경주는 이 세 번 모두 역사적으로 중요한 접점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내용으로, 전설의 인물인 ‘신공황후(神功皇后, 290-389)’가 바다를 건너 신라를 침공해서 정복했다고 본다. 이런 내용이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해서 통치했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는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이지만 일본은 이것이 자신들의 첫 번째 한반도 정복 사건이었다고 본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일본인들에게는 고대의 전설을 실제로 확인하게 해 줄 공간이란 점에서 매력을 주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1592-1598)이다. 일본의 침략 수년 전부터 예견되었던 이 전쟁은 조선의 조정이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한 채 맞닥뜨리면서 전국토가 전쟁에 휩싸이는 대참사를 겪었다. 경주는 전쟁 초반에 크게 밀렸다가 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반격을 하면서 전투를 이어간 경상도 일대의 주요 전장의 하나였다. 경주는 조선시대에 주요한 고문서를 인쇄하는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 1512년에 경주에서 인쇄한 정덕본(正德本)이 현재 보존되어 있는 판본 중 전체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삼국사기>는 임진왜란 때 인근의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 화를 피해 살아남았고, <삼국유사>는 경주의 문서보관소에서 탈취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근대 초기에 동경대 문고로 출간되면서 역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기구한 운명을 겪는다.


경주와 일본의 세 번째 조우는 일제강점기이다. 앞서 살펴본 과거의 이력 탓에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경주의 고적과 유물에 관심이 지대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경주의 유물들은 곧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길만 했다. 경주 일대에서 공식, 비공식적으로 출토된 유물들은 골동품상을 통해 공공연히 매매되었고, 일제강점기 경상도 지역에는 대단한 유물 컬렉션을 갖춘 일본인 수집가들이 여럿 존재했다. 이런 유물들은 해방 직전에 대거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일본인들은 경주를 일찍부터 관광도시로 개발할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주에서는 야외에 방치되어 있던 유적지, 불상, 석탑 등의 유물들을 재정비하는 사업을 벌이고,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경주 분관을 설치해서 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주고적보존회(1913)를 만들어서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함께 이런 일을 하도록 제도도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경주를 고적의 도시로 돋보이게 만드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석굴암과 불국사 복원

‘토함산정의 동측에 대석불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경주의 일본인들 사이에 떠돈 것은 1907년이었다. 과연 경주 주민들이 그 이전에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을까는 의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석굴이 무너진 채 나타나 세간의 비상한 관심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그때였다. 1909년 4월 말, 당시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경주를 방문한다. 당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던 긴박한 시절이다. 실제로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시절에 소네는 경주를 방문해서 석굴암의 가치가 ‘동양에 비길 데가 없는 최고의 걸작’(세키노 타다시의 평가)이란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석굴암을 해체해서 서울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 계획은 이후 무효가 되었지만, 땅속에서 발견된 이 놀라운 석굴은 불국사와 더불어 사진엽서로 만들어져 널리 유포되면서 경주를 조선 최고의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동인을 제공했다.


1912년에는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경주를 다녀갔다. 역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직접 보고 수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석굴암 석벽에 글자를 새기기도 했는데, 당시 석굴암을 다녀간 많은 이들이 기둥과 벽에 자신의 이름이나 문장을 남기는 훼손행위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13-1915년의 석굴암 보수공사, 그리고 이어진 불국사 보수공사 이후부터는 수학여행단의 단골 방문지가 되어서,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경주를 다녀간 이들의 여행기에는 응당 석굴암과 불국사의 사진과 감상문이 실리는 것이 관행이 될 정도였다. 이런 여행 러시에 신작로와 철도의 개통이 크게 역할을 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경주가 관광도시로 나아가는 데에는 일제의 최고권력자들이 직접 나서서 초기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던 것이 주효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금관이 몰고 온 파문

한편, 이런 관광의 시대가 개막하던 무렵인 1921년, 불에 기름을 끼얹듯 관광을 부추긴 놀라운 사건이 경주시내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순사 미야케 고조의 보고서 내용은 이러했다. ‘9월 25일 오전 9시경, 경주 노서리 봉황대 인근 박문환 소유 매립지에서 조선 아이 3-4명이 청색 유리구슬 서너 개씩을 들고 있기에 그 출처를 물어본 바, 박문환의 택지에서 갖고 왔다고 해서 가보니 조선인 인부 몇 명이 토사를 채취하고 있어 중지시켰다. 바닥에는 동그릇, 금제품, 유리구슬 등 유물로 보이는 것이 있어 즉각 채토를 중지시키고 유물은 현장에 보관했다.’며 상부의 지시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서울의 총독부에까지 보고가 되고 그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가 달려왔고, 경찰서장, 경주군수, 박물관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 경주고적보존회 와타리가 현장에 나타나 처리방안을 놓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서울서 처리 방안도 관계자 방문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경주시내에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한다. 당시 황사로 하늘빛이 어두워지고, 경주사람들 사이에는 일본사람들이 왕릉을 파헤치고 있다며 소요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순사 몇 명으로는 험악한 민심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들은 바로 발굴을 시작하게 되는데, 9월 28일에 최초의 신라 금관이 발굴되었고, 29일에는 금제요대와 다른 유물이 발굴되어 경주경찰서로 옮겨졌다. 이런 허술한 발굴로 인해 현장의 상태는 전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고, 적지 않은 유물은 그 사이에 사라지기도 했고, 유물을 적절하게 처리하지도 못한 탓에 최초의 신라 금관이 발굴된 금관총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분류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2015년에 금관총은 재발굴이 이루어져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 금관총은 내부를 볼 수 있는 노출형으로 재단장되어 전시관을 만들어놓았다.)


최초로 신라 금관이 등장한 일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유물들은 발굴 직후인 10월 14일과 15일 이틀간 경주경찰서에서 임시로 공개되었는데, 이틀 만에 지역주민 4천 명이 관람을 하는 대대적인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15일에는 경주시민대회가 열려 5백 명 이상이 참가한 가운데 조상의 무덤, 왕의 무덤을 마구 파헤치는 것에 대한 분노와 경주에서 나온 금관을 서울로 가져가려 하는 것을 성토하는 격앙된 분위기가 이미 조성된 상황이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전개와 시민대표단의 노력으로 결국 금관은 서울의 총독부 박물관으로 가지 않고 경주에서 보관하게 된다. 시민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1923년 10월 동헌 내부에 금관고를 지었다. ‘금관고’ 설립을 관철해 낸 일은 경주 지역사회에 뜻있는 민족의식의 각성을 불러왔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경주 최부자 최준도 창간에 참여한 바 있는데, 금관 발굴 관련 기사를 신속하게 알렸을 뿐 아니라, ‘경주 탐승과 환등영사회’를 신문사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시행하도록 지원했다. 1922년 4월 11일 경주제일교회에서 경주청년회 주최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금관과 경주의 신라유적을 환등기로 영사해서 보여주는 행사를 시작했는데, 이는 곧 전국적인 순회상영회로 이어졌다. 6월에서 8월까지 경북 일대를 순회했고, 10월부터는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서는 경운동 천도교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개성, 평양, 그 이듬해에는 강경, 이리, 1926년에는 함경도 북청에 이르기까지 수년에 걸쳐 신라의 역사와 미술, 문화재를 보여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는 곧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게 만드는 순환구조를 이루었다. 경주 수학여행은 이토록 일제가 자신들의 제국의 위상과 식민사관을 자랑하려는 욕구와 그간 억눌린 조선의 민족의식이 솟구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양면적 차원에서 독려되었다.  


이후 금령총, 식리총에서도 금관이 나오고(1924년), 1926년에는 경주역 공사를 위해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금관총 바로 옆의 언덕을 파헤치다가 심상치 않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는데, 일본은 고고학에 조예가 깊던 그를 이 발굴 현장에 초청해서 직접 금관을 꺼내도록 상황을 연출했다. 스웨덴의 한자 이름 서전(瑞典)에서 글자를 따와서 이름 붙여진 서봉총(瑞鳳塚)의 사연이다. 이렇게 유물이 늘어나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26년 7월 1일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개관하는데, 모로가 히데오가 초대 관장을 맡았다. 일본 당국은 외국의 요인들이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방문하면 꼭 경주의 박물관까지 보도록 안내할 정도로 경주는 중요한 위상을 가졌다. 1920년대부터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던 경주는,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김동환, 이병기, 김교신, 이광수, 현진건 등 다양한 지식인, 작가들이 다녀가며 언론 매체에 경주 여행기를 남기는 도시가 되었다. 경주를 다녀가고, 그 유물을 본다는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조선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신라유물의 수난

이런 와중에 발굴에 관여한 이들의 행태가 볼 만했는데, 1927년 11월 금관총 출토 보물들이 일시에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금관은 도난을 면했지만, 나중에 국보로 지정되는 금제허리띠까지 사라지는 대형사건이었다. 몇 달간의 수사에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범인이 유물을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인지 6개월 만에 도난된 것들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겨우 사건이 수습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내부자의 소행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의심이 크게 일었다. 1933년 검찰은 다른 도굴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주박물관장이었던 모로가 히데오를 배후로 체포하고 다수의 유물을 압수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집에 엄청난 규모의 유물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때 ‘경주왕’이라고까지 불렸던 그였지만 경주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1936년에는 서봉총의 금관이 전시의 일환으로 평양박물관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평양박물관 관장이 서봉총 발굴을 주도한 고이즈미 아키오란 인물이었다. 그는 전시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친구를 요정에서 접대하면서 동석한 기생 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다음날 박물관으로 오게 한 뒤 금관을 씌우고 금제장신구로 치장하게 하고 사진을 찍는 사건을 벌인다. 이 사진이 몇 달 뒤에 신문에 나오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유물의 발굴에 관여하던 이들이 얼마나 함량미달의 인물들이었고, 공사구분이 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일본인들의 행태가 국토를 침탈하고, 역사와 민족을 욕보이는 행위로 여겨졌다. 신라의 찬란한 유물들은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해 주었고, 이를 함부로 빼앗기지 않고 보존하고 되새기는 일이 곧 민족적 자존을 지키는 일이 되었다. 경주는 어느새 신라의 유산을 놓고 누가 그 가치를 점유할 것인지 경합이 벌어지는 장이 되었다.


유흥업과 관광산업

한편, 일본인들은 총독부를 통해 체계적으로 경주의 고적과 유물을 관리하며 발굴에 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경주 시내의 중심거리에는 고급 여관과 골동품상이 성업 중이었다. ‘경주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는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온갖 사안에 개입하고 있었고, 고급여관인 시바타 여관을 운영하던 시바타 단쿠로(柴田團九郞)는 유력한 손님들을 대상으로 골동품 매매에 깊이 관여하면서, 유흥을 알선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경주의 유흥업도 이런 조건 위에서 성장해 나갔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이라고 할 때,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구분했었는데, 왕 앞에 나아가 공연하는 일패나 관에 속해 기예를 선보이는 관기들이 주로 해당했던 이패는 잘 훈련된 기예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가란 사회적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조선말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는 이런 기생은 줄어들고 점차 술시중을 들고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로 인식이 바뀌어 갔다. 당시 경주 시내에 있었던 기생조합은 일제강점기 내내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갔고, 경주에 유흥업이 번창하면서 패가망신, 폭력, 치정범죄 등이 벌어지는 것을 개탄하는 신문보도도 여러 건 등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관광이란 것이 여행의 차원에서 상업적 기획을 넘어서 산업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가던 양상을 우리는 이 시기에 확인할 수 있다. 관광도시 경주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적 관광도시로 개발을 의도했던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의 관광여행과 문화 행태를 조선으로 도입했는데, 관광에 유흥적 분위기가 대대적으로 강조된 것은 아무리 봐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경주 시내에 유곽이 만들어지고, 시내 중심가에 유흥과 접대 행위가 공공연히 일어났는데, 일제강점기 내내 융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나중에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관광산업이 보여주게 되는 모습의 전조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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