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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Mar 01. 2024

08. 풍운아 박상진

1910년대 한 항일운동가의 초상

의병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은 하나의 흐름이 아니었다. 여러 복잡다기한 입장과 노선과 인맥과 처지가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을 지향하는 큰 흐름 안에서 저마다 각축하였다. 그것은 한 번도 단일한 체제나 신념으로 통일된 적은 없었다. 나는 경주, 혹은 좀 넓혀서 경상도권의 독립운동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런 여러 흐름과 결의 차이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여러 방향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외세 중 가장 침략의지가 강력했던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과격한 개입은 그때마다 의병의 등장을 불렀다. 아마 임진왜란 등의 과거 침략 시 관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의병이 일어나 맞서 싸웠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더욱 이런 형태가 왕성했는지도 모른다. 일본 자객단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을미사변(1895)에 분노해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1905년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체험을 한 대중들의 마음에는 전면적인 저항정신이 뿌리내렸고, 연이어서 군대 해산(1907)까지 벌어지자 이는 전국적인 의병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참여하면서 그 수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렀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이 유입되면서 의병들의 무력 수준이 달라졌다.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1909년이 되면 의병은 25,00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수천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면서 요인 암살과 납치 등으로 전술이 바뀌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뜻있는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나아가 군사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고, 독립운동이 해외의 거점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 계기였다.


앞서 경주와 경상도권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삼일운동의 규모나 여파가 덜 두드러진다는 평가를 접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이전인 의병 투쟁 시기와 1910년대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적절한 평가가 가능한 일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경상도권의 독립운동은 망국을 막 경험한 1910년 전후 시기에 의병운동의 형태로 매우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이런 투쟁이 불가능해지면서 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대거 이주해 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경상도권 내에서 저항운동을 하던 주요한 인적 물적 근거가 공동화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기반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중적 기반의 공백을 개신교와 천도교가 주도한 삼일운동이 메꾸어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경상도에서는 해외 독립운동의 배후기지 역할을 하면서 지도자를 배출하고, 군자금 조달 등에서 발군의 기여를 했고,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들을 조직해 내면서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인 활동근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흐름은 소위 '혁신 유림'이라고 불릴 양반들과 근대 교육을 받은 청년 엘리트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삼일운동에 대거 참여한 천도교(동학운동이 유림 세력과는 적대적이었던 것을 기억하자)나 외래 종교인 개신교와는 결이 다른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은 또 결이 달랐을 것이다. 삼일 운동 이후에는 이런 여러 흐름들이 상해 임시정부로 수렴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여전히 독립운동은 다양한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혁신 유림의 후예 박상진

그 시기에 경주 출신으로 가장 돋보이는 인물 한 사람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고헌() 박상진(1884 -1921)이다. 박상진은 울산 송정에서 나고, 1887년 네 살 때 경주시 외동의 녹동으로 이사해서 성장했다. 생부는 박시규이나, 자손이 없던 큰아버지 박시룡에게 입적되었다. 두 아버지는 이후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집안 분위기가 담백하고 학문을 중시하고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중시하는 양반가의 기풍을 갖고 있었다. 그는 15세에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사촌 누나인 최영백과 혼인하면서 경주 최부자집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는 7세부터 한학을 공부했는데, 그를 가르친 사종형 규진은 퇴계학을 계승한 경상도 혁신유림의 주요 인물들에게 수학한 인물이었다. 정재 류치명에서 석암 김도화, 서파 류필영 등으로 이어지는 ‘정재학파’라고 불리는 이 계보는 또한 안동을 기반으로 하는 경상도 의병운동의 주도 세력들이기도 했다. 을미의병 거병 이후 이들 중 일부가 청송의 진보에 은거하던 중이었는데, 박상진은 친지 방문과 학업을 목적으로 종종 진보를 찾곤 했었다. 거기서 그는 일생의 스승인 경북 구미 출신 왕산(旺山) 허위(1854-1908)를 만난다. 허위는 김천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켜서 전투에 승전하였으나 고종의 밀지로 해산한 바 있고, 진보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평리원서리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 조정의 고위 관직을 맡아 일한 사람이다. 그는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을 맞아 전국에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고, 관직에서 나와 1907년 ‘13도 창의군’을 조직해서 무장 항쟁에 나서 동대문 30리 밖까지 진격했다가 일본군에 패하고, 체포되어 1908년 9월에 55세 나이로 처형되었다. 당시 박상진은 직접 나서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


박상진은 1902년 19세 나이로 상경해서 스승 허위를 다시 만나 국내외 정세를 깊이 파악하였고, 스승의 권유를 따라 신학문과 신사상을 수용하기 위해 1905년 양정의숙에 1회 학생으로 입학해서 법률과 경제를 공부했다. 그는 거기서 보성전문에서 퇴학당하고 편입한 백산 안희제를 만나고, 서울에 있는 동안 김좌진 등과 의형제를 맺고, 선교사 허버트와도 만나는 등 인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 시기는 그에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고위 관직에 있던 혁신유림의 핵심세력과 긴밀한 관계였기에 그는 당시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스승이 결국은 관직에서 쫓겨나 의병투쟁을 하는 와중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독립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자신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폭넓은 행보로 당대의 운동을 훑어나갔다.


고헌 박상진(1884-1921)

판사대신 무장투쟁 지도자로

박상진은 1907년 안창호가 발의하고,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김구, 노백린, 신채호, 이상재 등이 참여한 신민회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민회는 당시 400-800명에 이르는 회원 규모로 당시 대부분의 주요한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되었던 조직이다. 이들은 토론을 통해 그간 국내에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으나, 이제는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1909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무력화되자 이들은 국외에 무장투쟁을 위한 근거지로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신민회 간부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해 나갔고, 국내의 여러 지역에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집단 해외이주가 시작되었다.


1910년 말 서울의 명문가인 우당 이회영 집안의 6형제가 가산을 다 정리하고 5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했고, 1911년 초에는 안동의 석주 이상룡 집안을 비롯하여 안동 유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왔다. 1912년에는 9개월간 경상도 지역에서 1,000여 명이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박상진은 1910년, 1911년에 중국을 다녀오는데, 서간도의 상황을 상세히 살펴보고 나서 국내로 돌아와 신문과 보부상단을 홍보수단으로 이용해 일반인들에게 만주 이주를 독려했는데, 경주 인근에서만 900여 명이 건너왔다고 한다. 과연 이때 건너간 경주사람들은 이후 어떤 궤적의 삶을 살았을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상진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1910년 봄 판사로 평양법원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을 포기하였다. 이미 그는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에 깊이 몸을 싣고 있었다. 그가 연관되었던 단체나 활동을 보면, 1910년대 운동의 양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우선 영남권의 명망가, 자본가, 청년들이 참여하는 단체에 관여했다. 1908년 재경 영남권 유생들은 지역의 교육진흥을 위해 '교남교육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경상도 각 지역에 신식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자는 계몽사업을 했는데, 설립 발기모임에 수백 명이 운집할 정도로 관심이 컸다. 대구 지역에서는 달성친목회가 설립되었다. 대구지역 청년들을 광범위하게 규합한 계몽단체였는데, 일제의 지속적 감시 대상이 되면서 1908년 창립 이후 해산되었다가 다시 재조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역시 400-500여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규모였다. 경상도권에서는 이렇게 전면에는 애국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 조직이 활동을 하고, 그 배후에서는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같은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지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박상진은 이런 비밀결사 단체들에 깊이 참여하며 지역 내 활동가이자 지도자로 역할을 했다.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광복회 총사령

1915년 7월 대구에서 풍기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 등 의병운동 계열과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 지역의 독립운동 인사들이 합류한 비밀결사 ‘광복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광복단, 대한광복회, 대한광복단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단체의 목적을 국권회복에 두고 있었다. 조직의 편제를 군대식 체계로 만든 것과 강령을 통해 무장투쟁 노선 위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독립전쟁론 노선에 서는 대표적 단체라고 볼 수 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재무부장은 경주 최부자집의 최준이었다. 김좌진도 이 단체 설립에 처음부터 관여했고, 만주를 넘나들며 부사령으로 역할을 했다. 광복회는 경주에 본부를 두고 국내와 중국의 주요 지점에 기관을 설치했는데, 대구의 상덕태상점, 영주의 대동상점 등 무역상점을 열어서 연락거점이자 운동자금의 송달을 감당하게 했다. 이런 조직망을 활용해서 경상도권의 운동자금은 만주의 무관학교 설립이나 군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다.


광복회 결성 이후 국내 지부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고, 지역의 자산가들과 회원들은 기꺼이 이 일에 재산을 헌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경주 아화의 ‘우편마차 습격 사건’이나 평안도 운산 금광회사 현금수송마차 습격 사건, 대구 권총강도 사건, 일본인 광산 강도 등의 사건도 벌였다. 전국의 부호들을 조사해서 군자금을 내도록 압박하는 포고문을 발송하고 찾아가서 돈을 받아냈다. 광복회는 조선총독을 처단하려는 거사를 계획하기도 했고, 지역의 친일매국노를 공개적으로 처단하기도 했는데, 원성이 높았던 칠곡의 장승원,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등이 이런 식으로 처단되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이들은 일제의 비상한 관심과 추적 대상이 되어 1918년 대대적인 회원색출 결과 61명이 정체가 드러나 체포되면서 광복회는 거의 해체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박상진은 안동으로 몸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주의 생모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동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주의 집을 방문했다가 체포되고 만다. 그는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8월 11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6세의 나이였다.


경상도 혁신유림의 격정적 궤적

박상진을 독립운동가로 기리고, 그의 사적을 관리하는 일은 울산에서 선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울산공항 인근의 송정동 생가를 복원해서 역사공원으로 만들어 놓았고, 인근에 박상진을 기리는 호수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이 동네에 그의 이름을 딴 박상진 길이 있고, 고헌 초등학교와 고헌 중학교가 있다. 경주시에서는 남산 남쪽 외동의 박상진 의사 묘소 외에는 그의 이야기를 접할 공간이 없다. 그의 주요한 성장과 활동 배경이 경주 쪽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제대로 그의 흔적을 살피고 기억하는 작업은 꼭 필요해 보인다.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에는 여러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사촌처남인 최준과 긴밀하게 운동을 함께 해왔는데, 그의 사망 이후 가족 간에는 깊은 악연을 갖게 되는 사연이 있었다. 박상진이 대구에서 상덕태상점을 열 때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저당 잡혔던 토지와 재산이 경매처분될 때 보증인이었던 최준이 이를 헐값에 매수하게 되는데, 이것이 동지의 재산을 갈취한 것인지, 양자 간의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어찌 되었건 박상진이 처형된 이후 시신이 경주로 왔을 때 사촌 누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최준은 지원을 하지 않았고, 장지가 없어서 장사를 지내지 못해 장인이 택지로 쓰려고 구해둔 외동 땅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박상진의 가족과 최준 간에는 몇 번의 소송까지 치러야 했고, 그 가족은 광복 이후에도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후세의 입장에서는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경주의 독립운동 역사를 캐고 들어가면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박상진 의사의 행보가 보여준 것처럼 1900년대에서 1910년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망하는 대충격을 맞닥뜨린 혁신유림 세력이 그 생각과 실천의 방향을 잡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격정적이고 전격적이었는가를 실감한 것이다. 당대의 공기에 배어있는 망국의 한스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다. 패배의식을 넘어서기 위해 대구경북권의 여러 인물들은 의병을 일으키고, 요인 암살과 관공서 공격을 하는 무장 투쟁을 전면화했으나, 수년에 걸친 일제의 강력한 진압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다. 활동 근거를 잃어버린 운동가들이 갑자기 만주와 서간도로 대거 이주를 해야 했던 과정에서 느꼈을 막막한 심정, 아무리 실력을 양성해서 일제의 강압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강고한 저 체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자괴감 어린 질문, 무력투쟁 노선을 선택하면서 그들의 머릿속에 지나갔을 수많은 의병 전투의 기억들, 물 설고 낯 설은 만주땅을 새로운 근거지로 선택해서 다시 시작하자며 수십 명 식솔을 데리고 떠나기로 결정하던 가장의 속 쓰림,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경주도 당대의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조선의 패망을 겪으며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노력했던 지역이며, 적지 않은 수의 대중들이 만주로 건너가거나 국내에서 저항운동을 펼쳤다. 지역 내에서 그들의 흔적을 복원하고, 그들의 기여를 기억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누구보다도 더 깊고 격렬하게 그 시절을 살았던 한 사람, 36세로 세상을 뜬 격정적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새겨본다.



참고자료)

박걸순 지음, 박상진: 독립전쟁론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051 (역사공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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