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일대기
‘부자’란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경원시되는 존재다. 그들이 누리는 부에 대해서는 동경하지만, 그 부의 기원과 출처에서 피할 수 없는 착취와 억압의 가능성은 다수의 정의감을 건드리게 된다. 부자의 얼굴에는 늘 이 두 가지 이질적 감정이 투사되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정형화의 틀을 벗어나는 반례에 사람들은 목말라한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부와 명예를 소유한 귀족들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모범을 보이는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국사회의 부자 이미지가 늘 졸부의 범주를 맴돌다 보니, 부의 명예로운 사용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사례가 등장할 때면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한 가문의 이야기는 좀 더 깊은 주목을 요한다.
최 부자집의 내력에 대해서는 02. '동도 경주' 편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의병장 최진립의 손자이자 경주 내남에서 본격적인 부를 일군 최국선(1631-1682)부터 시작해서 10대째가 되는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까지 이르는 이 가문은 1779년 내남에서 경주 향교가 있는 교촌으로 이사해서 자리를 잡고 경주의 유력한 부자 가문으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널리 알려진 가훈의 내용처럼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 거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는 등 도를 넘는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았고,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살피는 태도를 견지했다. 동시에 최부자집은 당대의 유력한 이들이 경주를 방문하면 늘 숙박을 청하던 명소였고, 일반 과객들도 들러 숙소와 식사를 대접받던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었다.
최부자집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큰 부자로 경주 지역을 넘어서서 당대의 사회운동과 교육 계몽운동의 유력한 후원자였다. 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으로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에 공동설립자로 참여해 거액을 기부했고, 호남의 만석꾼 인촌 김성수와 함께 경성방직, 동아일보 등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구한말의 의병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국내외 독립운동에 숨은 자금지원자이기도 했다. 의친왕 이강은 1909년 경주 최부자집을 방문해서 의병거사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삼일운동 직후 의친왕을 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에 지원하기도 했다. 순정효황후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에는 환영연회를 최부자집에서 열었는데, 망국의 설움으로 연회가 눈물바다가 되는 사건도 있었다. 경주 지역 사회에서 큰 일을 치러야 하면 최부자집의 손이 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전국적으로 일을 도모하는 이들은 경주에 와서 최부자의 협력 의사를 타진하고 도움을 얻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교촌의 최부자 집은 그러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의 발길도 잦았다. 최준의 아버지 최현식은 의병 지원과 국채보상운동에 깊이 관여한 이력이 있었고, 집안 연고로 동학의 최제우, 최시형 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자료로 완전히 입증이 되지는 않아 보이지만, 최시형이 최부자집에서 묵어가거나 가족들과 교류를 했었고, 최부자집에서 동학 성미를 각자의 이름으로 내었고, 최시형 자녀들의 유학을 지원하는 등의 정황이 있다. 손병희와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 대구경북권의 운동가들, 나중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등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최부자집을 다녀간 흔적이 다수 나온다. 이들은 여기서 은신을 하거나, 재정적 지원을 받거나, 회합을 하곤 했다.
대구경북권의 독립운동은 1915년 대구 달성친목회를 중심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만난 운동가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 등을 만들어 비밀리에 활동을 했다. 최준은 사촌누나의 남편이었던 박상진과 더불어 조선국권회복단에 참가했고, 이어서 더 격렬한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광복회에도 참여했다. 광복회는 경상도, 황해도, 충청도 등에 조직을 두고 있었고, 만주에도 지부가 있었다. 박상진이 총사령이었고, 최준은 재무부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본부는 경주의 박상진 본가였으나, 사실상 최부자집이 거점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15년 12월 24일 경주 효현교에서 인근지역의 세금을 나르던 우편마차를 습격해서 8,700원을 강탈한 사건을 비롯한 여러 건의 직접 투쟁의 배후로 활동을 했다. 최준은 우편마차의 운행 정보를 알아내고, 강탈한 돈을 숨기는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다.
경남권에 기반을 두고 독립운동을 하던 백산 안희제(1885-1943)와의 인연도 중요하다. 안희제는 박상진과 양정의숙 동기 동창이자, 최준의 동생 최완과 대동청년단을 함께 한 관계인데,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고(1914) 곡물과 해산물 등을 팔며 상해 임시정부에 재정 지원을 했다. 그는 빚으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최준을 찾아와서 며칠 머물며 간곡히 설득해서 그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그와 동업으로 1919년 5월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영남권의 대지주와 자본가들이 대거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고 자본금이 100만 원에 이르는 큰 회사였다. 최준은 사장 역할을 맡았다. 백산무역은 실제로 국내외 곡물, 면류 등의 무역업을 크게 하고 있었지만, 주목적이 해외의 독립운동, 특히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한때 임시정부 재정의 60%를 백산이 감당했다고 한다. 이들은 국내에 18개소, 중국에 3개소의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두고 영업활동과 독립운동 거점, 독립운동 자금 전달 역할을 했다. 사업의 성패와 상관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다 보니 결국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졌고, 1921년과 1923년 두 차례 주주들이 더 지원을 해주었지만 백산무역 안팎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1928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최준의 많은 재산은 다 소진되었다. 1921년 최준은 회사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식산은행 등에 재산 거의 전부를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았는데, 백산무역은 결국 파산하고 만다. 이로 인해 최준은 매우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는다. 이미 일제는 최준이 협조적이지 않고, 그 집안이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셋째 동생 최완은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위원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고향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막내동생 최순은 백산무역에서 일을 하며 군자금 조달을 맡고 있었는데, 1928년 백산무역이 파산한 이후 일제의 표적이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해방 때까지 잠행하며 지냈다. 그는 1948년 경주에서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했다가, 선거 며칠 전에 당시 경주경찰서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출신 서영출이 보낸 서북청년단원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을 당했다.
그러나, 최준과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자금이 필요했던 운동가들은 때로 최준이 돈을 주지 않을까 봐 그의 집에 강도로 들어와 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박상진이 복면을 하고 들어와 수표를 쓰도록 요구했던 일도 있고, 안희제도 복면을 하고서 돈을 받아간 일이 있었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고 약속대로 자금을 제공했지만, 이것이 서로 양해 하에 알리바이를 위해 벌인 일인지, 조바심과 의구심에서 비롯된 돌출행동인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최준은 자신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해 온 모든 사례가 다 제대로 집행된다고 생각지는 않았던 듯 하나, 이를 개의치 않고 가능한 지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되고 김구가 한국으로 돌아와 최준을 경교장으로 초청해 자금 지원에 대해 사의를 표하면서 임정의 장부 내역을 보여준 적이 있다. 거기에는 자신에게서 나간 돈이 안희제를 거쳐 빠짐없이 임정에 전달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최준은 그 내용을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안희제의 묘소가 있는 방향을 향해 큰절을 하며 “백산, 준을 용서해 주게. 내가 준 자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절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으로 늘 생각한 준을 용서해 주게”라며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백범과의 만남이나 장부 이야기에 대해서는 근거 자료가 명확지 않은 풍문이란 반론이 존재한다. 최준의 동생들이 백산무역과 임시정부에 재정담당자로 가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자금의 정확한 지원 내역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지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준의 재산은 1928년 백산무역주식회사 파산 이후로는 식산은행 등에 담보로 묶여서 쓸 수가 없었다. 일제는 재산을 강제집행하며 일본에 협력하라며 압박해 들어왔는데, 1936년 둘째 동생 최윤이 형과 동생들을 대신해서 중추원 참의를 받아들이자 대출의 일부를 탕감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최준은 주로 집안에 칩거하면서 사회활동을 줄였고, 정인보와 최남선을 일 년간 초청해 경주 지리지 <동경통지>를 펴내는 일(1933) 등에 집중했다.
해방 후 그는 조금 회복된 재산을 모두 교육사업에 출연하였다.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해서 운영하는 일에 자신의 집과 선산까지 모두 출연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64년 회사의 이미지 개선 및 사회 기여도를 높이기 위해 교육 사업을 모색하던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대구대 교수였던 신현확의 주선으로 최준을 찾아와 ‘대구대학을 맡겨주면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다’며 대학 인수를 제안했고, 최준은 이를 흔쾌히 수용하였다. 그는 대학운영권을 넘기면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후 비극적 사건의 씨앗이 된다. 불과 몇 년 뒤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이병철 회장은 재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 와중에 그는 대구대학을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인수했던 청구대와 통합해서 영남대를 출범시키는 일에 헌납하면서 최부자집의 재산 일체가 영남대 재단으로 귀속되는 일이 발생한다. 최준은 군인들의 방해로 영남대 통합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손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등 국가기관에 의한 겁박으로 원천봉쇄 되었다. 그 이후 몇 번의 송사가 있었으나 상황의 변화는 없었다. 지금 경주 교촌의 최부자집은 영남대 재단의 소유로 되어 있고, 최부자 집안 후손들은 이를 점유하고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경주의 독립운동, 혹은 영남권의 독립운동은 언뜻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덜 부각되어 있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별로 활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를 뒤져보니 이 지역은 의병운동 세력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꽤 오랫동안 만만치 않은 운동을 꾸려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박상진 같이 1910년대 무장투쟁론의 선두 주자가 있었는가 하면, 최준처럼 독립운동의 자금지원을 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헌신적으로 뛰었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서간도로 대거 이주한 서울의 우당 이회영 가문이나 안동의 석주 이상룡 가문 등과 가깝게 보조를 맞추어가며 국내외의 운동을 조율했고,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할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히 해외 독립운동의 본진과 교감하며 운동을 진행했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1910년 대에 이들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경상도권의 인구가 상당했다.
삼일운동은 당시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도적으로 대중운동에 나선 경우로, 경상도 고유의 유림세력과는 결이 다른 흐름이 전면에 부각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이들은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의 여러 흐름에 기반이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운동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1920년대 이후인데, 이들의 흔적도 경상도권에 꽤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나 충분히 발굴되어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런 저항운동의 주축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일반 대중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일본의 영향력은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거나 거부되었는지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많이 들을 기회가 없었던 내용들이라 하나씩 확인해 가며 배우는 과정이 흥미로왔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삶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영광스러운 헌신과 성공의 기록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긴장과 갈등과 궁핍이 연속적으로 압도하는 순간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젊음을, 혹은 생명을 흘려보냈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야 했으며, 재산상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후세가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할 길은 없다. 다만 그들의 기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잊힌 이야기를 복원하고 기억하는 일이 아마도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참고자료)
박걸순 지음, 독립전쟁론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051 (역사공간, 2014).
이동언 지음,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안희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016 (역사공간, 2010).
최부식 지음, 일제 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 (민속원, 2018). * 경주문화원 발간 비매품.
최혁 지음, 경주 교동과 최부자 (문상서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