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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Mar 08. 2024

10. 북에 소월, 남에 목월

시인 박목월과 낭만의 세월

경주란 무엇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경주를 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꽤 폭넓게 퍼져 있고, 여전히 영향력이 강하지만, 이번 <모던 경주> 연재를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경주는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로서만 아니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동경(東京) 혹은 동도(東都)로서의 든든한 존재감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특한 궤적을 그리며 근대로 전환을 겪은 그 자체로 독자적 시공간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경주는 또 다른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다.


경주를 신라와의 관계에서만 파악하려 한다면 경주는 약 천 년간 존재했던 ‘신라’란 역사적 범주의 공간적 배경으로만 축소될 것이고, 그 이후 천 년의 역사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만다. 경주를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축을 따라 그 시공간 전체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라야 ‘경주학’이라 이름 붙여볼 수 있겠다. 이미 이런 취지를 내건 학문적 연구들은 다방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신라학'은 역사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학'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역사학의 범주일지, 지역학의 범주일지, 혹은 다른 차원을 개척해야 할 일인지 아직 그 경계와 내용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신진 분야일 것이다. 나는 ‘경주학’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면서도, 그것이 기존의 영역과 분과 학문 아래로 얌전히 정렬되기보다는, 당분간은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시도를 하면서 지경을 넓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경주가 낳은 어떤 정조(情操)를 두고 씨름한 문화/예술/사상 영역에서 논의를 펼쳐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해서 앞으로 세 번에 걸쳐 경주가 낳은 인물을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그 첫째로 시인 박목월을 불러내어 본다.

시인 박목월 (1915-1978)


박목월이란 시인

박목월(1915-1978)은 본명이 영종이고, 1915년 1월 6일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경주군 수리조합 이사로 일하던 아버지 박준필과 기독교인 어머니 박인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에서 10리 길인 건천보통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는 대구의 계성학교로 진학한다. 그는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3년 동시 ‘통딱딱 통딱딱’을 잡지에 기고했고, 그 해에 현상공모에 당선됨으로써 정식 ‘동요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시인으로서 재능을 검증받았고, 스스로도 이 길을 걷기로 마음을 먹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경주 동부금융조합에 서기로 취직하였는데, 이 무렵에 당시 주요 3대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의 신춘문예를 줄줄이 석권하고 있던 세 살 위 동향의 소설가 김동리(1913-1995)를 만나 교류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유익순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창간된 문학잡지 <문장>에 ‘목월(木月)’이란 필명으로 투고해 세 번의 추천을 거쳐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 이때 그를 추천한 정지용이 남긴 평,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 요적 수사(謠的 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조선 시다”는 극찬을 받았다.


일제 말기 매체들의 폐간과 전쟁 발발로 흉흉했던 1942년, 시인 조지훈이 경주를 방문하며 나눈 서신 교환과 그 결과로 세상에 나온 시들, 조지훈의 <완화삼>, <낙화>, 박목월의 <밭을 갈아>, <나그네>가 유명하다. (* 조지훈과 박목월의 만남은 '01. 모던 경주의 풍경'을 참고하라.) 해방이 되자마자 좌우익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절 그는 김동리가 주도하던 우파 청년문학가협의회에 참여하는데, 조지훈, 박두진 등이 여기에 함께 했다. 1946년 6월 6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의 시를 모아 <청록집>을 발간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청록파’라는 이름을 얻는다. 1947년 그는 경주의 금융조합 이사직을 사직하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9년 서울 이화여고 교사로 옮기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할을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 와서 공군 종군문인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55년 개인시집 <산도화>를 출간함으로써 <청록집>으로 시작된 그의 초기 시 세계가 일단락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삶의 풍파를 통과한 시

한편 그는 대구 시절 자신을 연모하던 자매의 구애를 받아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언니는 결국 다른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지만, 동생은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목월을 만나면서 1954년 이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목월은 연인과 제주도로 살러 내려가 버렸다. 아내 유익순 여사가 4개월 만에 이들을 찾아와 그들의 꾀죄죄한 살림을 보고 조용히 겨울옷과 생활비를 건네고 돌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이들의 연애행각은 거기서 끝이 났고, 목월은 여인을 보내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사연이 담긴 시가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로 이어지는 ‘이별의 노래’라고 하고, 제주의 문인 친구들이 시와 노래를 지은 가곡 ‘떠나가는 배’도 목월의 사연과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1950년대 후반은 목월이 가장 궁핍했던 시절로, 출판사 일과 수많은 청탁 원고를 쓰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의 생활감 뚜렷한 시들이 이 시기의 경험으로 창작되었다. 1962년 목월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1963년에 그는 영부인 육영수의 ‘문학 개인교수’가 되어달라는 뜻밖의 청을 받게 된다. 이를 수락한 목월에게 비판적 시선도 많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일하며 영부인에게서 무명의 후원을 끌어내 후배 시인들의 시집을 30권 출판하는 등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는 그런 개인적 인연이 있어 육영수 사후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40대 이후 목월은 꾸준히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생이자 왕성한 활력의 시인으로 살아왔다. 1973년 시 전문잡지 <심상>을 창간하고, 1976년 시집 <무순>을 내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 후 돌아와 누웠다가 평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떴다. 유고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이 있다.


목월의 시 세계는 대중들에게 ‘송아지’ 혹은 ‘나그네’ 같은 서정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주 황성공원에 ‘송아지’ 시비가 있고, ‘나그네’ 시비는 보문단지 순환 산책로에 하나 서 있다. 그의 시가 널리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은 이유는 정지용이 잘 지적했듯, 민요 가락이 율동하듯 입에 붙는 운율과, ‘서정(敍情)’이 아니라 ‘서경(敍景)’이라고 불릴 만큼 선명한 그림을 그리듯 펼쳐내는 묘사의 탁월함에 있다고들 한다. 그것이 <청록집>에서 <산도화>에 이르는 첫 시기였다면, <청담>(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등에서는 ‘생활감정’에 밀착된 작품 세계가 두드러진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청담>에 나오는 그의 애절한 절창 ‘가정’이다. 시를 쓰는 가난한 가장의 어깨너머로 엿보이는 아홉 켤레의 신발들은 마냥 정감 어린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애틋하고, 그윽하고, 애처로운, 그래서 알전등 아래로 눈에 희뿌연 김이 서리는 풍경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서정도 아니고, 인생의 지혜를 이미 얻은 달관도 아니고, 삶의 무게 속으로 깊이 들어간 아비의 어깨너머로만 파악되는 풍경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읊는 축문

목월의 그 곱고 단정하던 목소리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격정적으로 축문을 읊는 데까지 이른다. <경상도의 가랑잎>에 담긴 ‘만술아비의 축문’이다.


아베요 아베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베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리고개

아베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손이믄

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경상도, 아마도 경주 사투리로 읽으면 그 억양마저도 생생하게 전해오는 서러움 가득한 시다. 목월은 어릴 적부터 동시를 써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낼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가 삶을 더 진득하게 담아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의 초기 시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그의 중 후반기 시에 우리가 들을 만한 깊고 그윽한 목소리가 더욱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흔들리고, 격정적이지만 그렇게 방향을 잡아가며, 인생을 견뎌내려는 의지가 단단한 그의 시어들은 어른의 세계를 제대로 담아낸다. 지금 우리는 이런 어른스러운 감성을 충분히 되새김질하고 있을까? 목월은 그 세계를 일깨워준다.


민음사에서 나온 <박목월 시전집>에는 900쪽에 걸쳐 그의 시를 담고 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으면 진한 일상풍경이 눈앞에 주욱 떠오른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시 세계에 경주의 자연과 도시 분위기가 끼친 영향을 자주 인정했는데, ‘폐허가 된 신라의 수도’에서 걷고 뛰며 놀았던 경험은 그의 정서를 형성하는 밑바탕이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거리랬자 5분만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불국사 앞의 동리목월문학관에 쓰인 내용으로 목월의 20대 심정을 토로한 구절이다. 그의 시에 토함산과 불국사와 경주의 산천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경주를 두루 훑으며 이를 넉넉히 감싸안는 정서를 포착한 그의 신앙은 개신교였다. 경주의 아우라가 흔히 무속이나 불교적 정서 속에서만 포착될 것이란 예단을 간단히 벗어나는 대목이다. 경주의 시공간에서 두드러지는 특수성이 보편성의 지평으로 뻗어 나아갈 때, 목월은 매우 신선하게 재평가되고 검토되어야 할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경주에서 목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다면, 먼저 불국사 정문 앞의 동리목월문학관에서 그의 문학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건천에는 그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고, 황성공원에는 '송아지' 노래비가, 보문단지 호수 산책로에는 '달' 시비가 있는 작은 목월공원이 있다. 그의 시를 다시 읽으며 경주의 산천과 하늘 아래를 거닐어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주여행이 될 것이다.


참고 자료)

이남호 엮음,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박현수 엮음, <박목월: 새미작가론총서 14> (새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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