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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Mar 12. 2024

11. 한국 근대문학의 괴물 소설가

김동리와 그의 시대

김동리라는 괴물

김동리는 생각보다 거대하다. 한국 작가 중에 가장 일찍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그의 주요 작품들은 해외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된 지 오래다. 서울대 국문학과 김윤식 교수는 그의 일대기와 작품을 샅샅이 훑어 삼부작으로 <김동리와 그의 시대>를 썼는데, 그는 서문에서 한국 근대문학에서 근대성 문제를 천착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이 계급성을 중심으로 근대를 넘어서고자 했던 카프 문학이었고, 이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만난 것이 포스트모던의 문제의식이었으나, 1989년 구소련의 해체 시기 ‘역사의 종말’을 논하던 시절에 비로소 김동리 문학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김동리 문학, 그것은 물론 근대가 아니지만 근대 이전도 근대 이후도 아니었다. 근대의 초극도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성의 논의 자체를 무화 시키는 늪과 같은 것이었다. 어떠한 근대성 논의도 김동리 문학에 부딪히면 무로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과제인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김동리를 찾아보는 것은 김윤식의 평가가 시사하듯 괴물처럼 근대와 맞닥뜨린 그의 작품이 건네는 이야기를 지금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재적이거나 미래적인 목소리를 들려줄 지도 모른다. 경주에서 그런 매혹적인 작가가 태어났고 주요 작품을 경주를 배경으로 썼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경주 자체가 현재와 미래를 향해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 많이 있다는 암시일 수도 있는 것이니…

동리 김시종(1913-1995)

신춘문예 그랜드슬램

동리 김시종(1913-1995)는 경주시 성건동에서 아버지 김임수와 어머니 허임순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 났다. 그의 학력은 경주 제일교회 부속 계남학교, 대구 계성중학 2년 수료, 서울 경신중학 3학년 편입 후 4학년 1학기까지 마친 것이 전부다. 그는 열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맏형 범부 김정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당대에 천재 소리를 듣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범부의 책장에서 철학, 문학, 역사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나가며 장래의 문학적 재능을 가다듬었다. 그는 1933년 서울로 김범부 선생을 만나러 올라간다. 거기서 범부의 주선으로 고창 선운사 쪽에서 올라와 세상과 불화하며 구도하듯 기행을 일삼던 2살 아래 문학도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된다. 그가 미당 서정주다.


동리는 이미 많은 작품을 습작하고 있었는데, 그의 문재는 바로 드러났다. 그는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로 당선되었고,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었다. 불과 3년만에 당대 3대 신춘문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당선작은 서정주의 ‘벽’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에 거대한 일가를 이룬 시와 소설의 양대 산맥이 그렇게 별안간 솟아나던 시절이었다.


동리는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했는데, 단편소설과 소설집이 꾸준하게 나왔고, 문단의 논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선배 세대인 유진오를 향해 ‘순수-세대’란 주제를 놓고 문학논쟁(1939)을 벌이기도 했고, 평론과 작품을 통해 카프 계열과도 논쟁을 했다. 해방 후 좌파 성향의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자, 우파 성향의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해서 박목월, 서정주 등 다수의 작가들을 끌어들이는 행동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소설집 <무녀도>(1947), <황토기>(1949) 등이 출간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1963) 등이 나왔다. 그는 문단에서 작가와 교수로, 이후에는 문단 원로로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과 1983년에서 89년까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중앙대 예술대학장, 1981년 예술원 회장 등 다양한 직함을 가졌다. 1990년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5년 81세로 세상을 떴다.


수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다른 인연으로 연결된 작가들도 그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는데, 대표적으로 <토지>를 쓴 박경리, 소설가 이문구, 이외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카프파와 논쟁하면서 우파적 입장을 견지했고, 문단에 우파 단체를 결성하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보수 진보 양측에 깊이 교류하는 이들이 많았던 문단 원로로 주로 활동했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 김월계(혼인 기간 1940-1966)와는 이혼을 했는데, 둘째 부인 손소희(혼인 기간 1948-1987)는 동리의 작품에 매혹되어 결혼한 상태에서도 만나오던 관계였다. 그녀는 결국 동리와 결혼해서 문단과 사회활동을 내조했던 동지 역할을 감당 했다. 셋째 부인 서영은(혼인 기간 1987-1995)은 30세 차이가 나는 신진 작가로 20대 중반에 동리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손소희 여사가 이를 묵인함으로서 관계가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손 여사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 서영은에게 남편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들이 남녀관계의 경쟁자가 아니라, 작가 김동리를 더 생각한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손소희, 서영은의 이야기는 당시 여러 매체에 인터뷰나 기사로 나온 바 있고, 서영은 작가가 직접 자신의 사연을 글로 남겨 출판된 바도 있어서 오랜동안 세인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소설은 ‘구경적 생의 형식’

김동리는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를 ‘구경적(究竟的) 생의 형식’이라 표현한 바 있는데, 여기서 ‘구경적’이라 함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미궁과 그곳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을 뜻한다. 문학은 이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공통 운명을 발견하는 형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문학이 정치적 투쟁의 선동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때로는 종교나 철학과도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이 궁극적 과제를 놓고 다툴 수 있다고 여겼다. 김윤식 교수는 이를 동리 문학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 보았다. 문학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두고 씨름하는 작업’이라 이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등신불> 같이 교과서에 실려서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문학적으로 가장 주목받기도 했고, 작가도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무녀도>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1936년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는데, 이후로 1947년과 1963년에 개작되었고, 다시 장편소설 <을화>(1978)로 확장되었다. 경주에 살던 무당 모화가 그의 이복남매 낭이와 욱이와 갈등을 겪다가, 큰 굿을 하며 금장대 아래의 ‘예기청소’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원작은 경주 지역에 불어닥친 기독교 선교의 분위기 속에, 살인죄로 복역했던 아들 욱이가 돌아와 있던 중 벙어리인 이복누이 낭이가 임신을 하게 되고, 모화는 이를 신령님의 점지로 단언하고 아이를 출산하면 낭이의 입이 열릴 것이라 예언했다가 유산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욱이와 낭이의 근친상간을 의심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무당 모화는 이 과정에서 딸의 임신을 마치 ‘동정녀 수태’인 것처럼 강변하고, 부당하게 비난 당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수난 모티브를 연상시키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 기독교에 비판적이면서도 기독교적 상징을 비틀어서 사용하는 무당 모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그 생동감 있는 언어와 쇼킹한 구성으로 큰 이목을 끌었다. 소설 후반에 강변에서 벌어지는 굿과 모화의 죽음은 이런 모든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전율스런 장면이다.


개작된 작품에서는 욱이가 살인자가 아니라 집을 가출했다가 서양선교사의 도움으로 잘 교육받고 돌아온 근대적 기독교인으로 그려진다. 근친상간 같은 쇼킹한 암시는 사라지고, 대신 욱이와 그 주변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무당 모화의 샤머니즘이 정면 대립하는 구도가 된다. 동리는 여기서 단순히 서양과 동양을 대립시키거나, 전통과 현대를 싸움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끼어서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채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하고 이를 운명으로 수용해야 하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될 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국의 드라마는 이것이 곧 우리 삶이 ‘구경적’임을 강렬하게 일깨워준다. 동리가 말하고 싶었던 문학의 역할과 자리를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맞대면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경주에 밴 동리의 흔적

동리는 자신이 애착을 갖고 있던 작품은 두어 차례씩 개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는 연작들을 많이 써왔다. 그의 문제의식은 반복 심화되고, 작품과 작품 사이를 오가며 상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왼편에 달렸던 강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사반의 십자가>를 발표하고서 수 년 후에는 아예 사반을 자신의 대화 상대로 불러내어 작품과 문학세계를 논하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몇 편을 챙겨서 직접 읽어볼 일이다. 유장하게 압도해오는 그의 싱싱한 언어들이 새로운 세대에도 계속 소구력을 갖고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감싸고 도는 아우라는 그의 핍진한 묘사력과 이야기 구성력에서 나오는 것인 바, 경주 사람으로서는 그 작품 세계의 배경이 먼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낯익은 지명과 역사들인 경우가 많아 그 울림이 남다르다.


현재 경주에는 성건동 강변도로 쪽에 동리의 생가터가 있으나, 이미 집은 헐리고 다른 집들이 건축되어 있어서 안내판 하나만 남아 있고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강변공원에 김동리 문학비와 안내 지도가 하나 서있다. 지도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장소의 위치가 소개되어 있다. 무녀도의 배경이 되는 금장대와 북천과 서천이 만나는 곳에 물회오리가 도는 ‘애기청소’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불국사 정문에서 석굴암 쪽으로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두 문학가의 작품세계를 잘 살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조만간 신축되는 시립도서관과 함께 있거나, 아니면 시내 쪽에 있었더라면 도보여행자들이 쉽게 찾고, 여러 행사를 진행하기도 수월했을텐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동리는 여러 면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참고 자료)

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

김윤식, <사반과의 대화> (민음사, 1997).

김윤식, <미당의 어법과 동리의 문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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