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제주(祭主) 김범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키워드는 민족과 국가다. 19세기에 조선왕조가 온통 무너져내리는 것을 경험한 민족은 한편으로는 거세게 덤벼드는 외세를 막아내면서, 새로운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의 전반부는 ‘나라 되찾기’가, 20세기 중반 이후는 ‘나라 세우기(nation building)’가 최고의 관심사였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놓고 처절한 사투를 벌였지만, 이는 어떤 세상,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와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었다. 경주에서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을뿐 아니라, 경주에서 그 대답을 찾고자 했던 사상가가 있다. 그는 범부 김정설(1897-1966)이다. 소설가 김동리의 16세 위 맏형, 바로 그 사람이다.
범부 김정설은 1897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13세까지 유학자 김계사에게 한학을 배웠고, 16세 무렵 경주 남문에 일제에 항거하는 격문을 붙인 뒤 산으로 들어가 움막살이를 하며 책을 읽었다. 범부(凡父)란 풀이 하자면 '평범한 아저씨' 쯤의 뜻이 된다. 그가 근대학문을 접하게 된 것은 경주 최부자집과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의 ‘기미육영회’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면서부터였다. 김범부는 이 장학회의 제1회 장학생이었으며, 이들은 이후 안호상, 이극로, 신성모 등을 독일과 영국 등지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경상도 지역의 청년들을 키워내려는 포부가 컸었다. 범부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에서 동양철학,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영어와 독어를 공부했고, 동경대, 경도대 등에서 청강으로 여러 분야를 섭렵했다. 25세에 귀국해서 현재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강의하고, 여러 사찰과 학교에서 불교철학과 동양사상을 가르쳤다.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만해 한용운, 김법린 등 당대의 불교계 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1941년 해인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간 수감되었고, 광복후에는 여러 정치단체에 참여했다. 부산에서 제2대 민의원(1950)에 당선되었고, 최부자집에서 설립한 경주 계림대 학장(1953), 건국대와 부산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5월동지회 부회장(1963)을 역임하며 재야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다가 1966년 사망했다. 그의 많은 글과 강연은 소실되어 현재 별로 남아있지 않고, <화랑외사>, <풍류정신> 등 약간의 저서가 존재한다. <범부사상연구회>가 결성되어 그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연구 논문과 단행본이 출간되고 있다.
“그는 불교, 유교, 도교를 중심한 동양철학에 정통한 학자로 그 방면에서는 널리 알려진 석학이었으나 웬 까닭인지 스무 살 안팎 때부터 경찰의 기피 인물이 되어 고향에서는 물론 어디로 가나 미행 대상이 되어 있었다. … 언제나 그를 존경하는 친구들이나 제자 뻘 되는 젊은이들의 후원과 알선으로 떠돌아다니는, <거리의 철학자>니 <당대의 이인(異人)>이니 하고 불리는 별명 그대로였다. … 그의 가족은 누구도 공직은 물론 일반 직장에도 취직이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사로운 장사일에까지 피해가 겹치곤 했다. …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갸륵한 집 사람들이라 하여 동정하는 것이 아니고, 시국에 맞지 않는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 집 사람들이란 눈으로 그네 가족들을 대했다.” (김동리의 미발표 원고 중. 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1)>, 23)
일제시대의 범부는 뛰어난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거리의 철학자로 재야를 맴돌았다. 동서양 철학에 달통한 그를 주로 불교계에서 불러 강의를 청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동방학(東方學)이라 명명했는데, 그 내용은 신라의 화랑도, 곧 풍류도(風流道)를 그 핵심으로 펼쳐 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장례를 맞아 미당 서정주가 쓴 축문이 유명한데, 그를 일러 ‘하늘 아래 제일로 밝던 머리’라며 범부의 총기를 칭송했고, 그를 ‘신라의 제주(祭主)’라 불러 그가 풍류도와 화랑정신을 오늘날 전면적으로 불러낸 낸 장본인임을 천명했다. 김지하 역시 범부의 존재감과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범부라는 사람을 잘 봐야 해요. 이 사람은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참 천재였다고. 풍류도를 어떻게 해서든 현대화시켜 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라. 건국 초기에 국민윤리 같은 걸 보면 어떻게 해서든 화랑도, 풍류도에서 국민윤리의 기본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 동학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라고. 고대 풍류도의 부활이라든가, 샤머니즘에 대한 재평가, 신선도에 대한 재평가 등 아주 중요한 사람이에요.” (이문재,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급하다: 율려문화운동 펼치는 시인 김지하’, <문학동네> 제17호(1998년 겨울))
“초점은 해방 직후의 김범부 선생에게 있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학의 최고 과제는 한마디로 줄여서 ‘최제우와 최한기의 통합’인데 제3휴머니즘의 철학적 근거가 될 범부의 ‘최제우론’과 ‘음양론’이 곧 다름 아닌 최제우와 최한기 통합의 지남침(指南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김지하, <예감>(이룸, 2007), 484.)
김지하는 특히 범부의 사상이 동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안목을 가졌으며, 당대 한국학의 과제를 풀어낼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지역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동학운동과 근접했던 범부가 동학을 풍류도의 재현으로 본 것은 동학의 기원과 성격을 규정하는 논의에 매우 중요한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화랑도’를 일본의 ‘무사도’와 같은 것으로 보고 군사적 특성을 강조한데 반해, 범부는 ‘화랑도’란 최치원이 말했던 ‘풍류도’를 말하는 것으로, 유불선 삼교를 다 포함하는 것이며, 종교적 요소, 예술적 요소, 군사적 요소가 어우러진 것임을 강조했고, 특히 종교와 예술의 차원을 중요하게 보았다. 종교적 요소로는 화랑이 갖는 샤먼(무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예술적으로 음악, 노래, 각종 기예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런 풍류도 정신은 어떤 경전이나 교단의 형태가 아니라, 민족의 혈맥 속에 흐르면서 역사의 추동력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범부는 이를 두고 현대어로는 ‘멋’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한국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이런 자세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풍류의 기반 위에 삶과 윤리를 쌓아가는 사회를 꿈꾸었다고 볼 수 있다. ‘화랑’은 아마도 이런 자질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화랑도의 최근세 재현이 동학에서 이루어졌다면, 경주는 이런 실마리를 풀어갈 최적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는 함의를 갖는다.
해방 후 범부는 사회활동을 활발히 했는데, 이 해방공간은 ‘나라 세우기’를 향한 저마다의 욕망과 주장이 만개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글을 통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간 자리를 결국은 민족국가가 채우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한 대비가 시급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영국, 일본, 독일 등의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소련의 사회주의가 다시 제국주의를 시도한다면 패착이라고 보았다. 미국은 제국주의를 할 수 없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는 국민국가를 이제 시작함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국민윤리’라고 보았고, 이를 고대 신라의 화랑정신에서 구했다. 그는 이를 위해 화랑들의 이야기를 담은 <화랑외사>를 썼고, 국가의 체제나 철학이 아니라 ‘국민윤리’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여러 글과 강연으로 강변했다.
그의 주장은 뜻밖에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서 많은 부분 채택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가 회장인 ‘5월 동지회’ 창립시(1963)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는 당시의 상당수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군사정권의 등장에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초창기에는 엘리트 군인집단에 대한 기대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들이 제안되고, 뜻있는 이들이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서 도움을 주는 일이 많이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일제시대부터의 농촌계몽운동을 해온 이들, 서울대 농대 교수였던 유달영 같이 공동체운동을 하던 무교회주의자들, 이후에는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 등이 함께 하다가 결국 관변운동이 된 것이다. 범부의 제안, 즉 화랑정신에 대한 관심, 국민윤리 등도 군부정권에서 호의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관변운동으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된다. 박정희 정권 내내 최대의 비판 역할을 했던 <사상계>의 장준하도 초기에는 군사정권의 등장에 기대를 걸었던 바 있었다. 사상가이자 경세가를 자처한 이들은 ‘나라 만들기’에 무어라도 힘을 싣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범부가 재야의 이데올로그로 얼마나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1966년 사망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이후 어떤 역사적 궤적을 그리게 되는지 보지 못했고,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탐구한 ‘화랑정신’이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사회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경주에서 김범부 선생을 재발굴해서 살펴보자는 제안은 여러 측면에서 고려할 부분이 있다. 경주 출신 천재의 계보에 걸맞는 최근 인사를 한 사람 더 채워 넣는 일일 수도 있고, 화랑도와 풍류도 논의의 안팎을 살피는데 요긴한 학자와 논객으로 참고할 수도 있고, 한국 현대사에 정치사회적 영향을 끼친 인물에 대한 입체적 평가를 위해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경주를 경주 그 자체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작업을 ‘경주학’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마도 경주에서 나고 자란 인물과 그들이 생산한 유무형의 작업결과물들을 아울러서 우리 시대를 향한 통찰을 얻고자 하는 것일 테다. 김범부 선생은 자신의 당대에 지식인이자 사상가로 폭넓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실험의 결과를 음미해 보는 이들에게 지금도 적지 않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선 굵은 유산을 남겨주었다. 경주가 신라 천년의 역사 이후 황량한 옛터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꾸준히 새로운 인물과 문화를 배출해서 더 넓은 세계에 기여하는 선순환의 터전으로 쓰임 받아온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경주보다 당대의 경주는 언제나 더 흥미진진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참고 자료)
김범부 지음, 김정근 풀어쓺, <풍류정신의 사람, 김범부의 생각을 찾아서> (한울아카데미, 2013).
김범부, <화랑외사> 2판 (이문출판사, 1982).
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