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항일운동에서 개신교의 주도적 역할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독립운동은 어떤 양상이었을까? 경상도 지역은 일제통치에 어느 정도 저항적이었을까? 그리고 실제 지역 내에서 독립운동은 누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대구경북권이 보수적인 정치사회적 정서를 갖고 있다는 인상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까 늘 궁금했던 탓이다.
가장 먼저 살펴볼 지점은 삼일운동이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대중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던 저항운동이었던 만큼 지역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데 가장 직관적인 그림을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된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그 이후 두 달 만에 800여 회의 후속 집회들이 열리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총독부 추산 106만 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진다. 사망자 수는 집계에 따라 편차가 큰데, 국사편찬위의 추정은 934명이다. 제암리학살사건을 비롯한 무도한 진압이 잇따랐고,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모진 고문으로 사망자가 이어졌다.
삼일운동은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고무되어 손병희가 이끌던 천도교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사회 내 여러 그룹과 접촉해서 의사를 타진했는데, 남강 이승훈 선생을 통해 개신교계가 참여하게 되었고, 만해 한용운을 통해 일부 불교계가 함께 했다. 유림들은 이때 충분히 설득되지 않아 동참을 하지 못해서 이후 운동과정에서 심하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심지어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로 알려진 이들까지 만세운동에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만세운동 이전의 국내 상황은 여러 면에서 사회적으로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무단통치로 불리는 강압적 통치 시기가 이어졌고, 쌀 수탈 정책으로 쌀값이 크게 오르면서 생활이 힘들어진 농민과 소작인들의 반발이 격화되고 있었던 와중에, 1918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번져 14만 명가량이 사망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던 참이었다. 거기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이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그의 죽음을 놓고 일제 독살설이 시중에 번져 나가면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실제 내부적으로도 우당 이회영 등이 고종을 해외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하던 중이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고종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2시 종로의 태화관에서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참가자들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운집한 대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만세운동은 가두시위로 번져 나갔다. 사전에 전국적으로 기획된 이 거사는 같은 날, 평양, 의주, 원산, 선천 등에서 일어났고, 그다음 날은 이북 전역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경상도 권에서는 서울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대구 YMCA 초대회장),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대구 YMCA 초대 총무)와 개신교 사학 교사들을 중심으로 3월 8일에 거사를 하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당일에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등의 학생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서문시장 인근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곧 1,000여 명이 참여해서 행진을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일제는 경찰을 투입해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지도부는 체포되어 몇 달씩 수감생활을 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도 있었다.
경주 역시 대구와의 연결 속에서 만세운동이 이루어졌다. 운동의 전국적 전개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운동 초기의 기획에는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이 두드러졌던 반면, 대중운동으로 전개되는 데에는 개신교 교회와 개신교 사학의 전면적 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개신교는 전국을 권역으로 나누어 교단과 교파별로 분할해서 선교하고 있었는데, 이런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경주의 거사 준비는 경주제일교회 목사와 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경주에 개신교 교회 설립은 대구제일교회 초대 목사였던 안이와(James A. Adams) 선교사에 의해 1902년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1909년에 계남학교를 설립하고, 지역사회에 차근차근 기반을 쌓아가고 있었던 참이었다. (훗날 대구제일교회 목사가 되는 이만집은 경주 안강 출신으로 1900년 안이와 선교사가 경주 시내에서 전도할 때 기독교를 접했고, 그의 주선으로 1906년 대구 계성학교에 한문선생으로 부임하고 이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3월 8일 대구의 만세운동 소식은 바로 경주로 전해졌고, 경주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주축은 노동리교회(현재 경주제일교회)였다. 이들은 3월 13일 시내에서 큰 장이 설 때 거사를 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 500장, 태극기 300장을 몰래 제작했다. 12일 새벽에 시내에 태극기를 뿌리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밀고하면서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날 거사는 그렇게 무산되었다. 큰 장은 만여 명이 모여들 정도의 규모라 일제는 장날 당일에 경찰 30여 명을 파견해서 삼엄하게 경계를 하며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감시했다.
한국사 연구자 아라키 준의 논문 "경주 3.1 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 2019)에 의하면, 시내 봉황대 인근에서 작은 장이 선 3월 15일에 주도자들은 만세 시위를 시작했고, 현장에 있던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150여 명 수준으로 불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이내 해산되었고,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재판에 넘겨져서 형을 산 이들은 총 12명으로, 노동리교회 박영조 목사(47세)를 제외하면 김억근이란 16세의 보통학교 학생 한 명과 20-30대의 젊은 노동리교회 교인들이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박문홍, 박영조, 김학봉, 조기철 등 4인은 10개월 형을 받았고, 나머지도 몇 달씩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들 중 박문홍(32세 농업) 같은 이는 일제의 금관총 금관 이송 반대 청원서에도 총 19명의 대표 서명자 중 조선인 10명 가운데 하나로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고, 이후 금관총 금관 환등영사회도 주도한 것으로도 나오는 바, 경주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갖고 여러 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개신교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이때 조사 과정에서 개신교와는 별도로 천도교 측에서도 만세시위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당일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후 체포 명단이나 다른 자료에는 구체적인 천도교의 흔적은 나오고 있지 않다.
한편, 이 당시 만세운동을 무산시킨 밀고자가 누구냐는 논란이 있는데, 경주에 영향력을 크게 갖고 있던 '모로가 히데오'였을 것이라고 당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08년 경주에 와서 대서업으로 출발해서, 고적과 유물의 수집과 유통에 깊이 관여하고, 1926년 경주고적보존회 활동, 이어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실질적 관장 역할을 거쳐, 1927년 경상북도 평의원으로 정계진출까지 한 바 있다. ‘경주왕’이란 별명은 허언이 아니었으나, 그는 1933년 도굴과 밀매가 들통나면서 경찰에 체포되어 지역사회에서 퇴출되었다.
경주의 삼일운동은 전국적 흐름과 보조를 맞추어 이루어졌고, 특히 개신교의 주도적 역할이 부각되는 사례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의 독립운동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삼일운동사 연구에서도 경주지역은 세부적인 조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경주 혹은 경상도권에서 독립운동이 덜 활발했던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혹은 최소한 대중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덜 부각된다는 평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경상도권과 경주에서 독립운동은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 정말 사회 전반이 일제에 협력적이었거나, 순응적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대구경북권의 보수성이란 것이 역사적으로 이렇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것일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우리는 매우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사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시 경주와 경상도권의 독립운동의 맥락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