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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Yang Feb 20. 2024

05. 근대가 일본과 함께 오다

신작로, 철도, 일본사람들

일본인이 본 경주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의 급격한 변동 속에서 안팎으로 크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혼돈과 불안감 속에서 점차 뚜렷해진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 제국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잡은 일본의 존재가 압도적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 1904년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1905년 을사늑약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압도적 무력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장악해 나아가고 있었다. 1910년에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를 당하지만, 이미 그 이전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조선땅에서 거리낌 없이 군사행동을 하는 등 전국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경주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술 내용을 따라 기원후 3세기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복했고, 백제와 고구려도 그에게 항복했다는 내용의 삼한정벌론을 믿고 있다. 그리고, 임진년의 조선 침략 역시 한반도에 대한 성공적인 무력 정벌의 기억으로 갖고 있다. 19세기말 그들이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하며 다시 조선을 침략해 들어올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고토(故土)' 회복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경주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환기시키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 같은 식민사학자는 "경주여, 경주여, 나는 우리 신라로 다시 돌아왔다"라고 경주를 방문한 소감을 남길 정도였다. 경주의 고적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것은 남의 역사가 아닌 자신들의 역사를 빛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과 시간표에 따라 조선을 차근차근 ‘근대화’ 시켜나갔다. 경주에 찾아온 근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작로와 철도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전국에 주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했고, 경상도에서는 대구와 부산이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배를 타고 일본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제 인천이 아니라 부산에 내려서 열차로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전국에 철도와 도로가 깔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순서는 중요도에 따라 진행되었다. 경주는 주요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일찍부터 교통망이 건설되었다. 관광도시로 개발하려는 의도가 일찍부터 뚜렷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경주에 찾아온 근대의 모습은 무엇보다 ‘신작로(新作路)’ 즉, ‘새로 만든 길’의 등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새로 열린 것이다. 1909년에 대구-경주 간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그 길이 대구-영천-서악-서천교-봉황대로 이어지는 길(현재 태종로)였다. 1912년에는 경주읍성을 헐고 시내 도로가 확충되었고, 경주시내에서 불국사 간에도 신작로가 놓였다. 1912년부터는 경부선 열차가 대구역에 관광객을 내려놓으면, 오츠카 자동차회사가 버스로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1920년대 이후에는 경주역 앞에서 관광객을 싣고 관광지를 오가는 서비스를 제공한 오카모토 자동차 회사가 성황리에 운영되었다. 일상적 교통수단으로 자동차가 신작로 위로 자유롭게 달리는 모습은 경주에서 근대의 도래를 이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줄 수 없는 대표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1910년대부터 경주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한 관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국사와 석굴암 방문은 1920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된 ‘수학여행’의 꽃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학여행은 다른 지역보다 이른 교통편의 확충을 통해 가능했다.


철도도 바로 깔렸다. 1918년 놓인 협궤열차는 대구에서 경주시내를 거쳐 불국사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당시 경주역은 현재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였고, 철도노선은 현재의 태종로길을 따라가다가 팔우정을 거쳐 불국사 방향으로 이어졌다. 철도노선에서도 잘 드러나듯 경주의 도로와 철도 개발은 관광도시로서 경주의 위상과 필요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1936년에 철로가 광궤열차용으로 바뀌면서 경주역은 시내의 성동동으로 이전했다. 경부선을 타고와 대구에서 환승해서 시내의 경주역에 도착하면 동해선을 타고 포항 방면으로 가거나 울산-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탈 수 있어서 이 지역에서는 주요한 환승역으로 기능했다. KTX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기차로 포항이나 울산을 가려면 경주를 거쳐야만 했었다. 2021년 연말에 시내의 경주역은 폐역이 되었고 KTX가 운행되는 신경주역으로 역사가 통폐합되었다.  


읍성 체제의 와해

그러나, 새로운 길의 개설은 경주의 지리와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매우 행정편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구에서 들어오는 신작로는 서악의 소티고개를 넘어오면서, 태종무열왕릉과 그 아들 김인문의 고분 사이를 끊고 가로지르며 개설되었다. 경주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는 철도 공사로 인해 사천왕사 터가 파헤쳐지고, 동궁과 월지도 그 배후의 궁궐터와 떨어져 고립되면서 여러 유적지가 훼손되거나 인위적으로 분할되는 등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초기의 신작로는 첨성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개설되었던 탓에 진동과 소음으로 첨성대의 안전성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서봉총의 발굴(1926)은 당시 경주역을 재보수하기 위해 필요한 흙을 당시에는 둔덕이라 여겼던 고분군을 파헤쳐서 퍼 나르다가 일부 유물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21년 경주읍성을 구성하는 남문과 남쪽 성벽이 해체된 일이다. 현재 폐역이 된 구 경주역에서 서천변까지 쭉 뻗은 중심대로인 화랑로는 원래 읍성의 남쪽 성벽이 서있던 자리이다. 법원검찰청 사거리 위치에는 경주읍성의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이 서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총독 데라우치의 경주 방문을 앞두고 그의 차량이 남문을 통과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남문과 성벽을 허물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주읍성은 다 허물어졌고, 그 석재들은 여러 다른 보수공사에 사용되었다.


경주읍성 중심의 체제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주 우편국(1902), 경찰서(1908), 법원(1908) 등의 근대적 행정기구들이 설립되는 와중에 조선시대 관청이었던 동헌, 객사인 동경관 등은 일제의 행정기구가 들어가면서 반복적으로 개축이나 이전, 철거가 이뤄지면서 원래 형태나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주부 동헌의 일부였던 일승각(一勝閣)과 대문인 내삼문(內三門)은 경주군청 신축으로 인해 해체되어 매각 대상이 되었는데, 경주의 만석꾼 부자였던 정두용이 이 건물을 낙찰받아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식을 기리기 위해 사찰로 건립함으로써 보존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 대릉원 후문을 마주 보는 법장사(法藏寺)의 본당과 대문이 동헌 건축물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경주의 일본 사람들

한편, 경주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의 법원검찰청 사거리 위치에 있던 남문에서 봉황대 방향으로 뻗은 길인 봉황로의 좌우로 빼곡히 입주해서 잡화점, 여관, 골동품상 등을 열어 중심상가를 점유하고 있었다. 아직 경주역이 이전되기 전 시기의 성동동 지역(현재 성동시장 자리와 화랑로 주변)은 일본인들이 소유한 여러 개의 과수원이 있었다. 1931년에는 구 읍성 공간 중심지 부근에 근대식 의료원인 야마구찌 병원을 설립했는데, 인근 지역에서 진료와 수술 등으로 찾아올 만큼 규모도 컸고, 위상이 인정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종교적 필요에 의해 일본 사찰인 서경사(西慶寺)도 읍성 안에 지어져서 아직까지 남아있다.


당시 경주의 유력한 일본인으로는 1910년 경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경주의 유적과 민담 등을 수집한 서적을 출판했고, 제3대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같은 이도 있었고,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냈고 ‘경주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지역사회에 깊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력자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고급여관을 운영하며 경주를 방문하는 유력자들의 접대와 골동품 매매에 관여했던 시바타 단쿠로(柴田團九郞), 야마구찌 병원의 의사로 근무하면서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수막새기와를 구매해서 소유하고 있다가 나중에 한국에 기증한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 같은 이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말부터 시작되는 한반도의 ‘근대화’는 일본의 기획을 따라 진행되었다. 때로는 무언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때로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 일본인들의 얼굴은 당연히 다면적 평가를 필요로 한다. ‘근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여러 얼굴을 갖고 있기에 전적으로 좋았거나, 무조건 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경주란 도시의 역사적 특징이 이 시기에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곰곰이 새겨보면 해방과 그 이후 시대에 경주가 가게 되는 방향이 이미 일제강점기 ‘근대화’ 과정에서 큰 흐름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본의 영향력과 흔적을 모두 다 수정하고,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뜰히 살펴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과 고치고 바꾸어야 할 것들을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시기를 좀 더 들여다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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