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리나무 Apr 09. 2020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은 요지경, 해외 장거리 커플의 연애 과정 


가끔 그런 밤이 있다. 새벽에 문득 깨어 다시 잠 못 이루는 밤. 

뒤척뒤척 다시 잠을 청하다 결국 마음을 바꿔 거실로 나왔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수면에 좋은 차를 우린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거리를 바라보며 잠시 예전 생각에 잠긴다. 




10년 전 내게 누군가가 호주라는 나라에 대해 아냐고 물었다면 내 대답은 '음..'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당신이 이후 그 나라로 건너가 살게 될 것을 아냐고 물었다면 아마 콧방귀를 뀌었을 거다.

그 정도로 나에게 있어 호주는 참 생소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워킹홀리데이나 여행을 통해 찾고 방문하는 나라임을 알지만, 당시 내게는 지구 어딘가에 붙어 있는, 캥거루와 코알라가 떠오르는 딱 거기까지인 나라였다.


따라서 남편을 처음 만나, 그가 호주 국적을 가진 호주인임을 알았을 때도 '아, 그렇구나' 정도의 인식에서 끝났던 것 같다. 심지어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연하라니. 그런 그와 5년간의 치열한 장거리 연애 후 결혼해서 살게 될 줄이야. 당시의 나로서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엄밀히 말하면 호주 국적을 가진 한국계 호주인이다. 생김새는 200프로 동양인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중국계로 오해하고들 한다) 이면서, 서툰 한국말을 하던 그가 이제는 말싸움에도 지지 않을 만큼 한국어가 늘었다.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나의 영어실력과는 무척이나 상반된다.) 어쩌면 그래서 조금 더 편한, 착하고 잘 따르는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첫눈에 내게 반해 근처를 맴돈 것일 줄이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겨도 자신은 호주에 가야 하니 고백하기가 미안하다는 그의 연애 상담 아닌 상담에, 눈치가 없던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라며 적극적인 응원을 해주곤 했다. 그것이 본인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Long story short, 그렇게 우리도 연상연하 커플이 겪는다는 밥 잘 사 주는 누나와 동생 시기를 거처, 썸 아닌 썸을 타다, 그의 서툴지만 진실된 고백을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연인이 되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반년 동안 남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기념일도 챙겼다. 함께 하면서 감정이 깊어지고 추억이 쌓일수록 그가 곧 떠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으나 대학 졸업까지 2년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믿고 결국 호주로 떠나보냈다. 그것이 장장 5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착하고 순진하지만 아직 20대 초반의 해외 사는 남자와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20대 중반의 여자 사람. 우리의 연애에 대한 반응도 각이각색이었다. 지금은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서 외국인 연인 혹은 배우자에 대한 소개도 많고 응원하는 분위기지만, 그 당시 우리는 그런 응원보다 현실적인 걱정과 관심을 더 많이 받았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너희가 서로 정말 좋아하는 건 알지만 현실적으로 지속되겠냐는 걱정과 함께 20대 중후반의 좋은 시기를 허비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고 연애도 하고 소개팅도 해보라는 권유도 참 많이 받았다. 반면 남자가 백 프로 거기서 딴 여자를 만나고 있을 거라고, 미련하게 군다며 놀리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진심을 이해하기에 혹은 굳이 얼굴 붉히기 싫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다가도, 그 말들은 꼭 마음이 약해지는 틈을 타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시처럼 찔러댔다. 과연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해 불안했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변심할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서 권유받은 것처럼 소개팅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이 사람에게는 숨기거나 죄책 감 없이 당당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다. 


중간중간 불안해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한 번도 우리 관계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오랜 장거리 연애가 결혼이라는 결실로 맺어진 데는 남편의 공이 매우 클 것이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어떻게 하면 빨리, 그리고 같이 있을 수 있을지였다. 단지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남편은 내게 말로 행동으로 끊임없이 확신을 주었고 사랑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직하게 또 미련하게 사랑을 했고, 결혼 소식을 알리는 순간 농담으로도 우리 관계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힘들었을까 싶다. 만약 조금 더 마음이 단단했더라면 흔들릴 일도 적었을까 아니면 좀 더 가볍게 생각했더라면 편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조금 덜 강견했기에 장거리 연애를 받아들일 만큼 유할 수 있었고, 고지식했기에 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이 있어 지금 함께 하는 순간이 귀하고 소중하다.




어느새, 뜨거웠던 차는 식고 해가 뜨기 시작한다. 


소소한 일상과 평범한 하루가 그리운 지금 시기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작가의 이전글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