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이 시간을 견뎌내는 법
'지독하고 처절하게 외로워보신 적 있나요?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 가슴에 블랙홀을 느껴보신 적 있나요?
내 안 어딘가에 까마득한 구멍이 뚫려있고 그 허함에 이유 모를 눈물, 흘려보신 적 있으신가요.'
돌이켜보면 이민을 왔기에 없던 외로움이 갑작스레 생긴 건 아니었다.
물론, 여러 상황이 변하면서 또 자연스레 사회적 관계가 줄어들면서 그 마음을 인식한 건 맞지만 바쁘게 살았던 한국 생활에서도 잊을 만하면 가끔씩 시린 바람이 남몰래 스쳐 가곤 했었다.
그렇다고 딱히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분명 남들이 보면 잘 지내고 있고 문제없어 보였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이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가 애매했다.
사치스러운 감정.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 배불러서 그런 거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봐. 아니면 생계를 유지하느라 아등바등하던가."
정말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 시절에도 이 '사치스러운 감정'은 내 곁에 있었을까. 그건 그저 자신의 내면을 반듯이 바라볼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죽여가는 것이 아닐까.
한국을 떠나온 지 2년하고도 반. 반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교민들이 보면 아직 신출내기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바리 새내기도 아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은 각자의 삶이 바쁘고 종종 연락을 한다 해도 물리적인 거리는 어쩔 수 없다. 한국에 있었다 한들 각자 자신이 향하는 길이 있기에, 그 길이 겹치면 더 가까워지고 또다시 나뉘면 천천히 멀어진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 이미 뿌리 내려 살아가는 이들은 일상을 반복하고,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서 하나둘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나 또한 나의 길에 있겠지. 그리고 자신을 멈춰있다 여길 것이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인연에는 시기가 있으니 떠나가는 인연을 억지로 잇지도, 오는 인연을 애써 막지도 말라며
그 순간 그 시절 서로에게 충실하다가, 인연이 다 했을 때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만 간직하라고.
어쩌면 나도 시절 인연을 겪는 중인지도 모른다. 옛 인연과 새 인연이 교체되는 과도기.
그 사이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공백을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지.
물리적인 시간은 묵묵히 견뎌내면 언젠간 지나간다. 하지만 이 과도기에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후 다가오는 인연들을 좋은 에너지로 채우기 위해서 먼저 나를 비우고 또 채우는 과정이 요구된다. 떠나가는 옛날을 쓰리지만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나는 예전에 못 했던 요리를 하고, 차를 몰며, 들리지 않던 이 나라 말을 쓰고, 경제적 자유를 위해 공부를 한다. 그사이 새 식구를 맞이했고, 또다른 새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들일지 모르나, 내게는 새로운 도전들이었고 천천히 나의 세계를 쌓아가고 있다. 그 속도는 느려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분명히 이 과도기가 끝나는 날 깨닫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아 멀리 왔구나.'
그때, 속이 꽉 찬 알밤 같은 내가 되어 있길 바라며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이 외로움을 처절하게 즐길 것이다.